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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시대 능등(能登) 지방의 영주.

개설

능등 지방에 근거를 둔 전산씨(畠山氏)의 2대 영주이다. 1432년 가문을 이었다. 1455년에 손자 의통(義統)에게 가문을 물려준 후 은거하였다. 1463년에 경도(京都)에서 사망하였다. 조선세조대부터 전산씨가 보낸 사절이 조선을 왕래하기 시작하였는데(『세조실록』 4년 윤2월 14일), 별개의 세력이 그들의 명의를 빌리거나 사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활동 사항

전산의충(畠山義忠)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원의충(源義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1460년(세조 6)에 원의취(源義就)가 각각 사신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세조실록』 6년 5월 15일). 이때 원의충은 조선에 표문(表文)을 올려 세조를 폐하(陛下)로 칭하면서 칭송하였다. 원의충 명의의 사절은 이 때 이후로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하였으며, 조선은 원의충을 준기 장군(駿驥將軍)에 임명하고 우황(牛黃)과 첨밀(甛蜜)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성종실록』 1년 7월 19일).

한편, 이 시기는 일본국왕(막부의 장군)이나 지역의 유력 영주의 사절을 사칭하는 위사(僞使)가 발생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원의충도 다른 세력이 그 이름을 빌린 것이거나, 사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의충 명의의 사절이 조선에 온 것은 1460년 5월 15일이 마지막이었다. 1470년(성종 1) 그의 아들을 자칭한 원의승(源義勝)의 사절에서 이름이 언급된 이후(『성종실록』 1년 7월 19일) 『조선왕조실록』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원의승은 1480년(성종 11)까지 조선에 10여 차례 사신을 보냈다(『성종실록』 11년 8월 11일). 원의충의 적자(嫡子)는 의유(義有)였는데 1440년에 전사(戰死)하였고, 의유의 아들 의통(義統)이 가문을 이었다. 원의승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만 등장하며 일본 기록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또한 원의충이 사절을 보낸 시기는 이미 그가 은퇴하여 현량(賢良)이라는 법명(法名)을 사용하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원의충 이후의 사절은 물론 원의충 명의의 사절 역시 위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守護·戰國大名事典』, 東京堂出版, 1998.
  • 『戰國人名事典』, 新人物往來社, 1990.
  • 橋本雄, 『中世日本の國際關係』, 吉川弘文館, 2005.
  • 한문종, 「조선전기 日本國王使의 朝鮮通交」, 『한일관계사연구』 21, 한일관계사학회, 2004.
  • 하시모토 유[橋本雄], 「宗貞國의 博多出兵과 僞使問題-『朝鮮遣使 붐」의 再構成을 위하여-」, 『한일관계사연구』 20, 한일관계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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