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懸板)"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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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6 기준 최신판



글씨와 그림을 쓰거나 새겨 건축물에 거는 널조각.

개설

현판(懸板)은 궁궐, 서원, 사찰, 주택 등의 건물에 거는 그림이나 글씨가 새겨진 판이다. 일반적으로 편액(扁額)과 통칭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편액은 건물의 앞부분 높은 곳에 설치하여 건물의 명호(名號)를 알려주는 액자만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현판은 편액을 포함하여 건물에 거는 모든 널판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내용 및 특징

현판의 종류는 궁궐, 문루, 객사, 서원, 사찰, 관청, 주택 등에 건물의 명칭을 나타낸 편액, 건물의 조영(造營)과 유래를 적은 서설(序說)·기문(記文)·상량문(上樑文), 유명한 글귀와 가훈을 적은 것, 명구(名句)를 새겨서 기둥에 거는 주련(柱聯)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다양한 종류의 현판을 거는 주요 목적은 건물의 명칭과 조영의 의미를 알려주거나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 경계할 수 있도록 하며, 더불어 유교적 성찰을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건축의 미관 장식, 재난을 방지하는 부적, 액막이의 목적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현판에 글씨를 쓰는 방식은 정해진 법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편액이나 짧은 명구는 가로로 쓰고 긴 문장이나 시문은 세로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규격은 건물의 규모나 성격에 따라 정해졌는데 종교 건축이나 일반 건축에 걸린 현판보다 궁궐 현판은 규모도 크며 당초문(唐草紋), 운문(雲紋) 등의 화려한 장식을 새겨 넣어 장식적인 요소를 가미하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의 대부분은 조선후기의 것들로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조선전기 이전에 제작된 현판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의 편액이 있다. 또한 고려 공민왕의 글씨가 새겨진 경상북도 안동 ‘영호루(映湖樓)’의 현판과 안동시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동웅부(安東雄府)’란 현판이 전한다.

조선시대 현판은 궁궐, 전국의 사찰과 서원 등에 많은 수가 남아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조선시대 한양에 있는 5대 궁궐과 종묘에 부착된 현판은 1260점이 전한다. 창덕궁에 267점이 남아 있어 가장 많고, 경복궁에 39점, 창경궁이 36점, 덕수궁이 16점, 종묘가 7점이 남아 있고, 훼손되어 없어진 건물의 현판으로 궁중유물전시관에 796점이 보관되어 있다.

사찰의 현판은 전각(殿閣)의 명칭을 쓴 편액과 사찰 창건이나 건물 중수에 관한 기록을 적은 상량문 등이 있다. 사찰 현판은 불사에 대한 배경과 과정 등을 상세히 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 이정섭, 「조선시대 궁중현판의 이해」, 『특별문화강좌』 제9집, 궁중유물전시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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