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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5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에 하급 관청이나 관원이 상급 관청이나 관원에게 올리는 문서.

개설

첩정(牒呈)은 등급이 있는 여러 관서 상호 간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문서 중 하나로, 주로 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에 어떤 사항을 보고할 때 사용하였다. 문서 형태가 정형화되어 있으며, 원래는 중앙 관부와 지방 관부 사이에서 사용하다가 조선후기에는 점차 확대되어 향교의 임원이나 면리임(面里任) 등이 고을 수령에게 특정한 일을 보고하거나 청원할 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하였다.

첩정은 관문(關文)과 함께 관리의 해유(解由) 때 인수인계를 위한 각종 보고문으로도 쓰였는데, 이 경우에는 ‘해유첩정(解由牒呈)’으로 지칭하였다. 『경국대전』「예전」과 『전율통보』「별편」에 첩정식(牒呈式)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및 특징

첩정은 서지적 분류로는 첩관통보류(牒關通報類)에 속하며, 발급·수취자에 따른 분류로는 관부 문서에 속한다. 그러나 첩관통보류는 말 그대로 첩(牒)과 관(關)과 통보류의 문기(文記)를 나열한 것이므로 분류로 보기에는 좀 어색한 측면이 있다. 결국 관부가 관부에 대하여 발급한 문기라는 후자의 분류를 채용하면, 이들 문서를 주고받은 대상을 중심으로 관(官)-관(官) 문서 정도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관문서의 경우 관-관 문서 이외에 관과 개인 사이에 주고받은 관(官)-사(私)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첩정의 규식은 『경국대전』과 『전율통보』에 수록되어 있으며, 양자는 규식이 거의 일치한다. 『경국대전』「예전」에 수록된 첩정식은 ‘모아문위모사운운합행첩정복청(某衙門爲某事云云合行牒呈伏請) 조험시행수지첩정자(照驗施行須至牒呈者) 우첩정(右牒呈) 좌첩정(左牒呈) 모아문(某衙門) 년인월(年印月) 일모직모압(日某職某押) 모직모압(某職某押)’이다.

첩정에는 첩정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한 서목(書目)을 첨부하는 경우가 많다. 첩정이 상부에 보고하는 형식의 문서이므로 보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여 앞에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문서는 형식이나 작성 절차 등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대에 아래에서 상달하는 보고 문서를 첩정이라 칭했는데, 이 또한 청대 이전부터 시행되던 문서 양식이 청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이므로 어느 시기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상행·하행·평행으로 나뉘어 시행했던 청대의 관문서 양식이 조선에 영향을 미쳤음은 확실하며, 첩정 역시 그중 한 가지이다.

상급 관부나 수령들은 첩정으로 보고받은 내용을 원문서 형태보다는 내용을 요약·등록하여 소장하고 업무에 참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학난기록』의 「순무사정첩보(巡撫使呈牒報)」와 「선봉진정첩보(先鋒陣呈牒報)」 등은 첩정을 등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완영일록』 등에도 첩정을 비롯한 관문서들이 옮겨 베낀 형태로 전하고 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 첩정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문헌은 『태종실록』으로, 첩정은 관과 함께 태종대부터 사용된 문서 형식으로 보인다. 1407년(태종 7) 각 관부 및 품계별로 문서의 상통식(相通式)을 새롭게 정하였는데, 각 아문과 사신이 동등인 자에게 대하여는 평관(平關)이라 하고, 한 등 이상 높은 아문에 대하여서는 첩정이라 할 것을 규정한 대목이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관부 간 등급의 격차에 따라 격자(隔字)의 방식과 수결을 사용할지의 여부 등도 이때 정해졌다(『태종실록』 4년 4월 6일).

1409년(태종 9)에는 삼군도총제부가 병조에 대해서는 첩정으로 하고, 병조 이외의 조(曹)에는 평관으로 하게 하는 등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즉 태종대에 관문서의 등급과 규식 등에 대한 대강을 정한 후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에 대한 보완 및 추가 규정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의 과정을 수용하여 『경국대전』「예전」의 첩정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전기의 첩정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권근(權近)의 『입학도설』의 배지(紙背)에 쓰인 「진보현감진상첩정(眞寶縣監進上牒呈)」을 비롯하여 「지영천군사진상첩정(知永川郡事進上牒呈)」, 「봉화현감진성첩정(奉化縣監陳省牒呈)」 등이 있다. 이들은 첩정 외에도 진성첩(陳省牒) 등 다양한 명칭으로 공개되어 있어, 첩정의 서식 연구와 더불어 명칭 표기의 표준화가 요구되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첩정의 사용 영역이 점차 확장되어 군현 수준의 읍과 면리의 면리임 사이에 주고받는 문서에서도 이를 차용한 사례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 향교의 임원, 품관(品官), 면임(面任), 두민(頭民) 등이 자기 고을의 수령에게 특정한 일을 보고하거나 청원할 때에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사용 영역이 확장되어도 아래에서 위로 특정 사안을 보고한다는 기본 틀은 바뀌지 않고 유지되었다.

의의

첩정을 비롯한 관문서는 조선의 매우 발달한 문서 행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첩정의 경우 다른 관부 문서와 달리 조선전기의 문서가 다수 남아있어 조선후기까지의 변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물론 전기의 문서가 모두 원본은 아니고 옮겨 베낀 문기 형태인 경우도 있으나, 그 경우에도 문서의 투식과 격식만큼은 원문서와 동일한 감각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활용 가치가 있다.

첩정은 중국에도 문서 예가 있고, 청대에는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었던 만큼 당·송에서 원·명을 거쳐 청대에 이르는 중국의 문서 발달사를 활용하여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는 시기의 첩정을 비롯한 관문서의 발달사를 규명할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례로 첩정에 남아있는 청조험시행(請照驗施行) 수지첩정자(須至牒呈者) 등의 투식은 중국의 문서에서도 비슷한 예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호 간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첩정은 관과 관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임에도 대부분 양반가의 고문서 더미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관문의 발급·수급 당사자이거나 해당 관서에서 관직을 역임한 이들이 관문을 개인적으로 소장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관문서·관부 문서·관서 문서로 지칭되는 문서들의 보존 방식이나 절차 등에 대한 연구에도 단서를 남기고 있는 문서 양식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율통보(典律通補)』
  • 윤병태, 『한국고문서정리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 이수건 외, 『16세기 한국 고문서 연구』, 아카넷, 2004.
  • 조선총독부 중추원 편, 『이두집성』, 조선총독부 중추원, 1937.
  •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1989.
  • 박병호, 「세종 21년의 첩정」, 『법사학연구』 1,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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