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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4 기준 최신판



환곡의 이자에 해당하는 환곡모조(還穀耗條)의 준말.

개설

환곡은 농민에게 식량 또는 씨앗으로 쓸 곡식을 빌려주어 곡식의 재생산을 보조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곡물이 자연적으로 소모·감축된 것을 모조라고 하였다. 곧 환모는 환곡의 자연적 소모분 만큼을 원곡에 더해서 환수하는 것을 말하였다.

그런데 환모는 단순히 환곡의 원곡을 채우는 구실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을의 재정으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16세기 이후 수취제도가 변하는 가운데 전정(田政)과 군정(軍政)의 수취 액수가 고정되어 가자, 국가 재정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환곡에서 모조(耗條)라는 명목으로 거두어들였다.

내용 및 특징

환곡은 조선전기부터 국가의 예비곡(豫備穀)이었던 군자곡(軍資穀) 중 일부를 이용하여 농민에게 빌려준 곡식을 의미하였다. 환곡은 보관하는 과정에서 쥐·참새 등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소모·감축되었고 이것을 모조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줄어든 모조를 채우기 위하여 환곡을 갚을 때는 그에 해당하는 양의 곡식을 더 갚아야 했다. 즉, 모조는 빌린 곡식에 더하여 갚는다는 의미에서 이자에 해당하였으며, 환모는 환곡의 모조를 줄여서 일컫는 말이었다. 이 말에는 환곡이 농민 구제책으로 진대하는 것이므로 이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모조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경국대전』「호전(戶典)」 군창(軍倉) 조에도 ‘군자창에 별창을 설치하여 잡곡을 양축하여 백성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본수를 받았다.’ 하여 모조를 법령으로써 받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반면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봄에 백성에게 빌려줄 때 절반은 창고에 두고 가을에 거둘 때 모조를 1/10로 취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전기에 환모가 법전에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제로 거두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환곡의 원곡을 채운다는 구실로 수취가 이루어졌을 것이며, 일부 고을에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고을의 재정으로 활용하거나 일부는 지방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16세기 이후 수취제도가 변하는 가운데 전정과 군정의 수취 액수가 고정되어 가자, 환모를 통하여 국가 재정의 부족분을 메워 나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변천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모조의 일부인 1/10을 호조(戶曹)로 상납하여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부세(賦稅)제도의 변화와 함께 부족해진 재정원(財政源)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와 함께 환모를 회록(會錄)하는 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회록이란 회계 장부인 회안(會案)에 기록하는 것을 뜻하였는데 중앙 재정으로 포함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위의 주장은 당장 시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모조의 1/10을 호조의 재정으로 이용하는 일분회록법(一分會錄法)이 시행되면서 실질적으로 환곡의 모조가 국가 재정의 부족분을 충당하는 데 쓰이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환곡의 성격이 바뀌게 된 실마리는 회록이 시작된 16세기 후반에 열렸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 초에 들어서면 삼분모회록(三分耗會錄)이 시행되어 모조의 3/10이 호조로 회록되었다. 이는 병자호란 직후 재정이 고갈되자 김응조(金應祖)가 건의하여 임시로 시행한 것이었다(『효종실록』 1년 4월 5일). 그러나 10여 년간 운영하는 과정에서 환곡 부담이 커지는 등 회록법의 폐단이 많아지자 김응조는 다시 건의하여 삼분모회록을 일시 중단시키고 환곡의 포흠분을 정비하거나 진휼의 용도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회록법은 이미 상당히 정착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곧 중앙과 지방의 각 아문에서는 모조를 활용하여 재정을 보충하려고 환곡을 새로 설치하거나 기존의 환곡을 늘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호조·상평청·진휼청·비변사 등을 비롯한 중앙의 각 중요 아문(衙門)들과 지방의 감영·병영·수영, 그리고 그 밖에 진보(鎭堡) 등에서도 환곡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경비가 필요할 때마다 환곡의 종류를 새로 만들어 환곡의 형태로 운영하였다. 이에 따라 환곡이 국가 재정에서 담당하는 비중은 점점 더 커졌다.

환모가 회록되기 시작하면서 그중 일부는 국가 재정의 경상비로 지출되었지만 일부는 다시 원곡이 되어 환곡 총액을 증대시켰다. 또 환모를 취하기 위하여 각 아문마다 새로운 환곡을 설치하면서 환곡의 증가 폭이 더욱 커졌다. 더구나 재정으로 쓰고 남은 모조라든가 산성곡(山城穀)처럼 모조가 전부 원곡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아서 환곡의 총액은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하여 18세기 초에 약 5,000,000석밖에 안 되던 환곡의 총액이 18세기말~19세기 초에는 약 10,000,000석까지 올라갔다. 겨우 1세기 동안 2배로 늘어난 것이었다.

이와 함께 환모의 회록율(會錄率)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본래 환모는 1/10이었다. 호조에 회록이 시작될 때도 처음에는 모조의 1/10에 한정되었고 나머지는 여전히 지방 재정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 뒤 호조와 상평청에 모조의 3/10이 회록되기 시작되면서 회록율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속대전』에 의하면 고을별로 호조곡·상진청곡을 중심으로 환곡의 운영 기관과 환곡의 액수에 따라 회록율이 달랐다. 많은 경우 모조의 2/3인 66.7%에 달하였다. 삼분모회록 이후 새로 설치된 아문곡의 경우에도 회록율이 매우 높았으며, 그중 상당수는 모조 전체를 회록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더욱 심하여 대체로 상평청의 경우에만 법전에 따라 4/5를 회록하고 호조곡은 9/10를, 그리고 그 밖의 경우는 모조 전부를 회록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의 세입 규모에서 환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항목별로 살펴본다면 환모는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를 합한 결세(結稅)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환모는 조선후기 재정에서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었고 이 때문에 농민들의 부담이 커져 19세기 농민항쟁이 크게 발발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Ⅰ』, 일조각, 1984.
  • 송찬섭, 『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 송찬식, 「이조시대 환상취모보용고」, 『역사학보』 27,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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