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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4 기준 최신판



사자 무늬가 그려진 명나라 선덕제의 청화백자 음식기 세트.

개설

청화사자백자탁기(靑花獅子白磁卓器)는 명나라 선덕제(宣德帝)가 1430년(세종 12)에 사신을 통해 하사한 물품의 목록에서 청화운룡백자주해(靑花雲龍白磁酒海)와 함께 확인되는 명대 선덕 관요에서 제작된 청화백자이다(『세종실록』 12년 7월 17일).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유입된 명대 자기는 1450년(문종 즉위)을 기준으로 유입 경로와 성격에서 변화를 보인다. 1450년 이전에는 명나라 황제의 하사품을 포함하여 명나라 사신들이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1450년 이후에는 사행 무역이나 밀무역 등을 통해서 유입되는 예가 대부분이었다. 1450년 이전에 명나라 사신이나 선덕제가 하사한 기명 중에 주로 ‘주해(酒海), 주주(酒注), 종(鍾), 잔(盞)’ 등의 주기(酒器) 종류와 식탁 하나를 구성하는 식기 세트인 탁기(卓器)가 확인된다.

명나라와의 교류 과정에서 많은 명대 청화백자가 유입되었지만 명나라 황실 자기를 하사품으로 전한 황제는 선덕제가 유일하다. 선덕제는 1428년(세종 10)에서 1430년(세종 12) 사이에 총 네 번에 걸쳐 백자나 청화백자를 사신 편에 보냈다. 그 명칭을 보면 특이한 형태나 문양을 가진 예가 많고 수량도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10년 7월 19일), (『세종실록』 11년 5월 2일), (『세종실록』 11년 11월 2일). 1430년에 명나라 사신이 가져온 청화사자백자탁기와 청화운룡백자주해도 선덕제가 하사한 것으로, 사자문과 용무늬가 그려진 특별한 청화백자이다. 청화사자백자탁기는 사자문이 청화 안료로 그려진 청화백자이다. 탁기는 식탁 하나를 구성하는 음식기의 조합인 한 벌을 의미한다. 『세종실록』「오례」에 도해된 ‘백자청화주해(白磁靑花酒海)’는 선덕제가 하사한 청화운룡백자주해와 동일한 기물로 보거나, 또는 조형적인 영향을 받아서 조선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5세기에 명나라로부터 조선 왕실에 유입된 자기들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명나라 번왕(藩王) 무덤에서 출토되는 자기와의 관련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왕실의 관요였던 번천리 9호 요지에서 출토된 「백자청화천마문뚜껑편」의 천마문과 귀갑문의 구성이 명나라 번왕인 안숙왕(安肅王)주경부(朱經扶)의 무덤에서 출토된 선덕연제 「백자청화인물문매병>」 문양과 유사하다. 15세기에 명나라로부터 조선 왕실에 전해진 자기들이 번왕 무덤의 출토품과 연관이 있는 상황은 당시 명나라와 조선의 정치적인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나라는 조선의 왕을 번왕으로 대우하였으며, 조선도 주원장이 하사했다는 『번왕의주(藩王儀註)』를 여러 예법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조선초기에 왕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접대하는 경우, 제사나 의례 절차뿐만 아니라 이때 사용되는 기명·의복 등도 번왕의 예에 의거하였다(『세종실록』 17년 2월 4일), (『성종실록』 19년 3월 10일). 적어도 1450년 이전에 명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전해진 자기들은 명나라 번왕들에게 하사된 자기들과 동일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 번왕들의 무덤에서 많은 자기가 출토되었는데, 번왕에게 많은 물품을 하사하는 것은 명나라의 전통이었다.

탁기는 탁자 위에 놓이는 그릇들의 특정 조합을 의미하며, 서양에서 사용되는 ‘Tableware’ 정도로 여겨진다. 주목되는 점은 선덕제가 이미 1428년(세종 10)에 백소자기(白素磁器) 10탁(卓), 1429년(세종 11)에 백자기 15탁을 하사한 예가 확인된다. 탁기의 기종과 수량은 1425년(세종 7)에 명나라 사신이 홍희제(洪熙帝)의 명으로 조선 왕실에 열 개 탁자에 필요한 백자를 요구한 기록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탁자마다 대·중·소 완(椀)이 각각 한 개, 대·중·소 접시[楪兒]가 각각 다섯 개, 대·중·소의 장본(獐本) 열 개를 요구하고 있다. 한 탁자 위에 대·중·소 완 세 개, 대·중·소 접시 다섯 개씩 열다섯 개, 대·중·소 장본 세 개를 합하면, 총 스물한 개의 그릇이 탁기 한 벌이 된다(『세종실록』 7년 2월 15일).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명선종궁중행락도」에 묘사된 식탁에서도 완 모양의 그릇 네 개, 크고 작은 접시 열다섯 개가 확인되어서,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탁기의 기종 및 수량과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변천

현재 명나라 선덕 연간에 관요에서 제작된 청화백자 중에 사자문이 시문된 예는 대만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청화사자희구문반(青花獅戲球紋盤)」이 유일하다. 접시의 안바닥에는 사자 두 마리가 공을 가지고 놀고 있으며, 겉면에는 공을 가지고 있는 사자 다섯 마리와 함께 화폐인 은정(銀錠)과 산호(珊瑚) 등의 잡보문(雜寶文)이 시문되었다. 공 모양의 물건은 항상 사자와 함께 표현되는 문양으로 수를 놓아서 만든 ‘수구(繡毬)’이며, 길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굽의 안바닥에 청화로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德年製)’라는 관지가 남아있어 선덕 연간에 관요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김윤정, 「朝鮮初 酒器의 조형 변화와 원인」, 『강좌미술사』 37호,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11.
  • 전승창, 「조선 초기 명나라 청화백자의 유입과 수용 고찰」, 『미술사학연구』 264, 한국미술사학회, 2009.
  • 丁鵬勃, 「明代藩王墓出土瓷器硏究」, 『中國歷史文物』 第1期, 中國國家博物館,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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