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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41 기준 최신판



코발트 안료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리고, 장석유(長石釉)를 씌워서 1,350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백자.

개설

청화백자(靑畵白磁)는 코발트 안료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리고 장석유를 시유한 후에 1,350도의 고온에서 구워낸 것이다. 중국에서 원대에 코발트 안료가 이슬람 지역에서 전래된 이후인 14세기경부터 강서성(江西省)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14세기 고려시대에 원·명대 청화백자가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청화백자는 조선시대에 15세기경부터 중국에서 회청(回靑) 안료를 수입하여 경기도 광주 일대 가마에서 제작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및 특징

청화백자는 백자에 코발트 안료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린 자기를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청화(靑花), 청화(靑畵), 화자기(畵磁器), 화기(畵器) 등으로 표기하였다. 명나라에서 전래된 청화백자는 주로 ‘靑花’로 표기한 경우가 많다.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청화의 한자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으며, 대한민국은 ‘靑畵’, 중국은 ‘靑花’, 일본은 ‘靑華’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백자에 코발트 안료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리는 것은 원대 14세기 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원대에 이슬람인들과 교류가 많아지고, 이슬람인들이 중국 본토에 정착하면서 이슬람 지역에서 이미 도기의 문양을 장식하는 데 이용하던 코발트 안료를 경덕진요에서 백자의 문양을 그리는 데 활용한 것이다. 코발트 안료를 회청이나 회회청(回回靑)으로 부르는 이유도 이슬람 지역권을 회회(回回)라고 부르는 것에서 기인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14세기부터 원·명대 청화백자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과 가마터 및 출토 유물, 전세 유물 등에 근거할 때, 조선시대 15세기 중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는 “회회청을 중국에서 구하여 술병과 술잔에 그림을 그렸는데, 중국과 다르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회청이 드물어서 중국에서조차 많이 구할 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 1463년(세조 9)과 1464년(세조 10)에는 비싸고 구하기 힘든 청화 안료를 국내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차례 기록될 정도로 회청의 대체 안료를 구하고자 노력했다(『세조실록』 9년 5월 24일), (『세조실록』 9년 윤7월 3일), (『세조실록』 10년 8월 7일). 1469년(성종 즉위)에는 사기(沙器)를 만드는 데 필요한 회회청을 구하면 관직을 주고 베 50필을 포상하겠다는 내용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예종실록』 1년 10월 5일).

17세기에는 병자호란 직후에 청화 안료를 구하지 못해서 왕실 연향이나 각종 의례에서 사용할 화준(畵樽)이나 용준(龍樽)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적지 않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인조반정 때 깨진 용항아리를 다시 만들지 못해서 가화(假畵)로 대신 사용하다가 대신들에게 가지고 있는 청화백자 용항아리를 바칠 것을 권유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하였다. 1626년(인조 4)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역관에게 좋은 품질의 화룡준(畵龍樽) 한 쌍을 사 오도록 하자는 사옹원 도제조의 제안이 수락되기도 하였다. 결국 빌려 쓰거나 중국에서 사 오는 등의 일도 여의치 않아서 석간주(石間朱)로 만든 화룡준으로 사신을 접대하였다. 현재까지 조사된 17세기 관요 가마터에서는 청화 안료보다 철화 안료를 사용한 백자편이 많이 확인되는데, 이는 17세기에는 대부분 철화백자로 용문항아리가 제작되었다는 문헌 기록을 뒷받침한다.

18세기에는 전반적으로 나라가 안정되면서 청화백자의 제작도 활발해지는 양상을 보이지만 비싼 청화 안료의 사용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영·정조 시대에 왕실의 연향이나 의례 등에 사용되는 화룡준을 제작하는 것 외에 다른 그릇에 청화 안료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처를 여러 번 볼 수 있다(『영조실록』 30년 7월 17일). 청화 안료를 금지한 이유는 비싼 가격으로 인한 사치스런 그릇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18세기 말에는 분원에서 그릇을 만들 때 사용하는 청화 안료와 갑발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결국 정조가 내린 채화갑번의 금지는 1790년대 후반에 청화백자의 제작을 감소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미 형성된 좋은 품질과 다양한 형태의 자기에 대한 수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희경(李喜經)은 정조가 검소함을 숭상하여 갑기를 금하고 화려한 채색을 없애니 부호들이 조선 그릇은 사용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 자기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으며, 조선에서 만든 백자 그릇은 더 거칠어지고 품질이 나빠졌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9세기 분원에서 사용하는 회청은 무명이(無名異) 혹은 무명청(無名靑)으로 가격이 점차 싸져서 분원의 서리들이 중국 연경(燕京)에서 사 온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19세기에는 중국산 토청이 조선에 싼 가격으로 유입되면서 청화백자가 활발하게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청화백자의 제작을 알 수 있는 15세기 편년 자료로는 1456년(세조 2)에 죽은 세조의 빙모이자 윤번(尹璠)의 아내인 흥령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의 청화백자 묘지(墓誌)와 황희 정승의 아들 황수신(黃守身)의 청화백자 묘지가 남아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백자청화 매화절지문 완」은 굽바닥에 ‘정식(鄭軾)’이라는 이름이 쓰여있다. ‘정식’의 몰년이 1467년(세조 13)이므로 청화백자완은 1467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완의 바깥면에 있는 매화 가지가 90도로 꺾이는 간결하고 절제된 듯한 청화 문양의 표현은 남송원체(南宋院體) 화풍의 수지법(樹枝法)으로 그림을 제대로 배운 화원의 솜씨라고 할 수 있다.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백자청화 송죽문 항아리」는 화엄사(華嚴寺) 각황전에서 꽃병으로 사용된 것으로 전하는데, ‘홍치이년(弘治二年)’이라는 명문이 남아있어서 1489년(성종 20)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청화백자 항아리는 땅 위에서 올라오는 소나무와 대나무의 모습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표현한, 청화백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선전기 청화백자의 문양 표현에서 수지법이나 준법(皴法)이 사용되고, 경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원들이 분원에 가서 직접 문양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사옹원 관리가 화사(畵史)를 인솔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광주 분원에서 어기(御器) 제작을 감독하였다는 문헌 기록으로 확인된다. 조선전기 청화백자의 문양은 대나무, 소나무, 매화, 새, 들국화 등의 소재가 주를 이루면서 회화적 구성과 표현을 사용하여 같은 시기의 명대 청화백자의 문양과 차별화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경기도 광주 관요 가마터의 경우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에 운영된 우산리 9호 가마터에서 청화백자운룡문항아리편, 도마리 1호 가마터에서 시문(詩文)·소나무·매화·새 등이 그려진 청화백자편,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 매죽문·천마문 등이 그려진 청화백자 뚜껑편 등이 출토되었다. 실제 관요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청화백자의 양은 매우 적어서 당시 회청 안료가 매우 비쌀 뿐만 아니라 구하기조차 어려웠다는 문헌 기록을 뒷받침한다.

17세기에 운영된 관요 가마터에서는 청화백자가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선동리(仙東里) 2호 가마터에서 ‘제(祭)’명 청화백자편 등이 출토된 예가 있다. 17세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용문항아리가 철화백자로 제작되었다. 그 밖에도 호랑이, 매화, 대나무, 포도, 초화(草花) 무늬가 시문된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다. 18세기에는 패랭이·들국화와 같이 초화 무늬가 간결하게 시문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는데, 주로 금사리 가마터에서 이러한 청화백자편이 발견되었다. 관요가 1752년(영조 28)에 분원리에 고정된 이후에는 소상팔경계의 산수, 초충(草蟲), 사군자, 시문, 분재(盆栽), 모란, 봉황 등 청화백자의 문양 소재가 더욱 다양해졌다. 19세기는 청화백자의 제작이 가장 활발해진 시기로, 문자·박쥐·모란·잉어 등 길상적인 의미를 가진 다양한 소재와 중국 자기의 영향을 받은 문양이 등장하였다. 19세기에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값싼 청화 안료의 수입으로 청화백자의 제작이 더욱 쉬워졌다. 또한 상업의 발전과 유통 시장의 확대가 청화백자의 제작과 수요를 늘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용재총화(慵齋叢話)』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 방병선, 「조선 전기 한양의 도자―청화백자를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19,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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