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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국(종묘 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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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국(경원도호부)]]
{{집단기구|대표표제=공작국|한글표제=공작국|한자표제=工作局|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종묘(宗廟) 사직(社稷)|분야=정치/행정/관청|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초기|왕대=조선초기|집필자=이석규|설치시기=1394년(태조 3) 11월|폐지시기=1395년(태조 4)|소속관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065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0_001 『태조실록』 2년 2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1003_001 『태조실록』 3년 11월 3일]}}
 
 
 
조선 건국 후 한양에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
 
 
 
=='''개설'''==
 
 
 
공작국은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으로 옮긴 직후 설치되어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개국 초에 공조(工曹) 전서(典書)이민도(李敏道)가 종묘 세우기를 청하고, 이어 1393년(태조 2)에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권중화(權仲和)가 종묘의 구상도(構想圖)를 그려 올렸다. 이에 태조가 서운관의 풍수학인(風水學人) 이양달(李陽達)과 배상충(裵尙忠)에게 지형을 살펴보도록 하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김사행(金師幸)으로 하여금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0_001 『태조실록』 2년 2월 10일]). 이듬해 공작국을 설치하여 종묘와 사직 건축을 관장하게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1003_001 『태조실록』 3년 11월 3일]).
 
 
 
=='''조직 및 역할'''==
 
 
 
공작국의 조직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종묘와 사직은 국가의 토대가 되는 상징이고, 각종 공역을 담당한 도감, 색 등이 당상-낭청으로 구성되었음을 미루어 공역을 총관한 당상과 실무를 지휘한 낭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새로 천도한 한양에 왕조의 토대가 된 종묘와 사직을 건축하였다.
 
 
 
=='''변천'''==
 
 
 
1393년에 설치된 공작국의 변천이 어떠하였는가는 불명하다. 그런데 한양의 종묘와 사직 건축공사가 1394년에 완료되었고, 국은 여타의 도감, 소, 색 등이 특별한 일이나 공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가 그 일이 완료되면 혁파되는 임시기구였다. 이 점에서 공작국은 1394년 종묘와 사직의 준공과 함께 혁거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분류:정치]][[분류:행정]][[분류:관청]][[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초기]][[분류:조선초기]]
 

2018년 1월 24일 (수) 22:09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