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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후원 서쪽 궁장의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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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 서쪽에 위치한 월랑문.
  
 
=='''개설'''==
 
=='''개설'''==
  
금화문(金華門)은 고종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북쪽 마당 서편에 있었다. 유생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경복궁에 들어올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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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 창덕궁 중수 과정에서 대조전(大造殿)의 서쪽 월랑문(月廊門)을 금화문(金華門)이라고 했다. 하지만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 이후 금화문에 대한 기록이 여러 문헌에서 보이는데, 이를 살펴보면, 창덕궁 내각 왼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추정된다.
  
=='''위치 및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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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소장된 「북궐도형(北闕圖形)」을 살펴보면, 금화문은 신무문 북쪽 마당을 감싸는 서쪽 궁장에 위치한다. 서쪽 궁장 남쪽에는 2칸의 추성문(秋成門)이 있고, 북쪽에 단칸의 금화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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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광해군 3)에 광해군은 “대조전의 서쪽 월랑문을 금화문으로, 동궁(東宮)의 북쪽 별당을 사경당(思敬堂)으로 이름을 정하였으니, 지난번에 계하했던 읍취문(挹翠門)의 편액과 함께 속히 현판을 걸게 하라.”고 지시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11023_005 『광해군일기』 3년 11월 23일]).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금화문이 등장하는 유일한 사례이다. 명확하게 대조전의 서쪽 월랑이라는 위치까지 기술했기 때문에 내용에 오류는 없을 듯하다.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면, 1872년(고종 9) 2월 3일에 고종이 경무대(景武臺)에 나가서 유생들이 시험 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날 유생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문을 통해 들어오는데, 선전관(宣傳官)의 잘못으로 유생들이 추성문을 통과했다. 추성문은 왕이 출입하는 문이며 유생들은 금화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 일로 문의 개폐를 담당하던 선전관이 처벌을 받았다. 위계에 따라 사용하는 문을 명확히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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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궁궐지(宮闕志)』에는 대조전에 대해 “희정당(熙政堂) 북쪽에 있는데 대내(大內)의 곤전(坤殿)이며 정당(正堂)이다. 무량각(無樑閣)으로 남문은 선평문(宣平門), 동문은 함광문(含光門), 서문은 경극문(慶極門)이다.”라고 했다. 즉 대조전 서쪽 월랑에는 경극문이 위치하며 금화문은 보이지 않는다. 「동궐도(東闕圖)」에도 경극문이 기록되었고, 『궁궐지』에도 대조전의 서행각은 10칸인데, 이 안에 관리합(觀理閤)있고 남쪽에 경극문이 있다고 했다. 창덕궁과 관련한 대부분의 고문헌에서 금화문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중수할 때 대조전(大造殿)의 서쪽 월랑문(月廊門)을 금화문이라고 하였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oa_10311023_005 『광해군일기』 3년 11월 23일]),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불타 버렸다. 그 후 창덕궁 내각 왼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을 금화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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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지』에는 창덕궁에 대해 “1592년(선조 25)에 병화로 인해 불탔는데 1609년(광해군 1)에 이르러 중수했다. 1623년(인조 1)에 반정 후 병화로 인해 대내가 연달아 불타고 수정당(壽靜堂), 충묵당(沖默堂), 인정전(仁政殿), 익각향실(翼閣香室)만 남았다. 1647년(인조 25) 가을에 왕명으로 인경궁(仁慶宮) 전각을 철거해 중건했다. 전각의 명칭은 고치지 않았지만 구조는 모두 바꿨다.”고 기록되었다. 즉 1611년(광해군 3) 창덕궁 중수 과정에서 광해군이 대조전 서월랑문을 금화문이라고 했지만, 1623년 인조반정 때 소실됐고, 1647년(인조 25)에 다시 대조전을 건립할 다른 이름으로 변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47년에 창덕궁 중건 및 대조전 건립 내용을 수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에서도 금화문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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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승정원일기』의 기록들을 통해 창덕궁 다른 곳에 금화문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668년(현종 9) 9월 4일자 기록에 세자가 도총부(都摠府), 홍문관(弘文館) 근처로 옮기게 됐으니 진선문(進善門) 북쪽에서 시작해 금천교(禁川橋) 서쪽, 금화문(金華門) 동쪽까지 전면 마당에 기둥을 세우고 휘장을 쳐서 안쪽을 가리라는 지시가 있다. 또 1690년(숙종 16) 10월 14일에는 세자가 내의원(內醫院)으로 옮기게 되어 금화문 서편과 내의원 부근에 잡인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즉 금화문은 도총부, 홍문관, 내의원 인근에 위치한 문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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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지』에서는 홍문관에 대해 이문원의 동쪽, 내의원의 남쪽에 있는데 옛날의 사인사(舍人司)라고 했고, 도총부에 대해 창경궁 광정문 밖에 있는데 옛날에는 금호문(金虎門) 안, 지금의 이문원(摛文院)에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인정전 서쪽 행각의 서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금화문은 금천교 정면 마당에 위치한 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금화문 서변 궁장’, 또는 ‘금화문 북변 궁장’, ‘금화문 상변 궁장’이 허물어져 수리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금화문은 창덕궁 서쪽 궁장과 연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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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내용을 검토하면, 금화문은 내각 왼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궐도」에는 단칸의 문만 그렸을 뿐 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동궐도형(東闕圖形)」에도 문의 위치만 그렸을 뿐 이름을 적지 않았다. 한편 고종 대에 경복궁 후원의 서쪽 궁장에도 같은 이름의 금화문이 있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북궐도형(北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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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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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지(宮闕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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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1, 서울학연구소, 1994.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1, 서울학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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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_00017961_「동궐도」, 창덕궁 내각 서쪽 담장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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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53 판



창덕궁 대조전 서쪽에 위치한 월랑문.

개설

광해군대 창덕궁 중수 과정에서 대조전(大造殿)의 서쪽 월랑문(月廊門)을 금화문(金華門)이라고 했다. 하지만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 이후 금화문에 대한 기록이 여러 문헌에서 보이는데, 이를 살펴보면, 창덕궁 내각 왼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추정된다.

내용

1611년(광해군 3)에 광해군은 “대조전의 서쪽 월랑문을 금화문으로, 동궁(東宮)의 북쪽 별당을 사경당(思敬堂)으로 이름을 정하였으니, 지난번에 계하했던 읍취문(挹翠門)의 편액과 함께 속히 현판을 걸게 하라.”고 지시했다(『광해군일기』 3년 11월 23일).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금화문이 등장하는 유일한 사례이다. 명확하게 대조전의 서쪽 월랑이라는 위치까지 기술했기 때문에 내용에 오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궁궐지(宮闕志)』에는 대조전에 대해 “희정당(熙政堂) 북쪽에 있는데 대내(大內)의 곤전(坤殿)이며 정당(正堂)이다. 무량각(無樑閣)으로 남문은 선평문(宣平門), 동문은 함광문(含光門), 서문은 경극문(慶極門)이다.”라고 했다. 즉 대조전 서쪽 월랑에는 경극문이 위치하며 금화문은 보이지 않는다. 「동궐도(東闕圖)」에도 경극문이 기록되었고, 『궁궐지』에도 대조전의 서행각은 10칸인데, 이 안에 관리합(觀理閤)이 있고 남쪽에 경극문이 있다고 했다. 창덕궁과 관련한 대부분의 고문헌에서 금화문은 보이지 않는다.

『궁궐지』에는 창덕궁에 대해 “1592년(선조 25)에 병화로 인해 불탔는데 1609년(광해군 1)에 이르러 중수했다. 1623년(인조 1)에 반정 후 병화로 인해 대내가 연달아 불타고 수정당(壽靜堂), 충묵당(沖默堂), 인정전(仁政殿), 익각향실(翼閣香室)만 남았다. 1647년(인조 25) 가을에 왕명으로 인경궁(仁慶宮) 전각을 철거해 중건했다. 전각의 명칭은 고치지 않았지만 구조는 모두 바꿨다.”고 기록되었다. 즉 1611년(광해군 3) 창덕궁 중수 과정에서 광해군이 대조전 서월랑문을 금화문이라고 했지만, 1623년 인조반정 때 소실됐고, 1647년(인조 25)에 다시 대조전을 건립할 때 다른 이름으로 변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47년에 창덕궁 중건 및 대조전 건립 내용을 수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에서도 금화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의 기록들을 통해 창덕궁 다른 곳에 금화문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668년(현종 9) 9월 4일자 기록에 세자가 도총부(都摠府), 홍문관(弘文館) 근처로 옮기게 됐으니 진선문(進善門) 북쪽에서 시작해 금천교(禁川橋) 서쪽, 금화문(金華門) 동쪽까지 전면 마당에 기둥을 세우고 휘장을 쳐서 안쪽을 가리라는 지시가 있다. 또 1690년(숙종 16) 10월 14일에는 세자가 내의원(內醫院)으로 옮기게 되어 금화문 서편과 내의원 부근에 잡인들의 왕래를 금지시켰다. 즉 금화문은 도총부, 홍문관, 내의원 인근에 위치한 문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궁궐지』에서는 홍문관에 대해 이문원의 동쪽, 내의원의 남쪽에 있는데 옛날의 사인사(舍人司)라고 했고, 도총부에 대해 창경궁 광정문 밖에 있는데 옛날에는 금호문(金虎門) 안, 지금의 이문원(摛文院)에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인정전 서쪽 행각의 서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금화문은 금천교 정면 마당에 위치한 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금화문 서변 궁장’, 또는 ‘금화문 북변 궁장’, ‘금화문 상변 궁장’이 허물어져 수리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금화문은 창덕궁 서쪽 궁장과 연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내용을 검토하면, 금화문은 내각 왼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궐도」에는 단칸의 문만 그렸을 뿐 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동궐도형(東闕圖形)」에도 문의 위치만 그렸을 뿐 이름을 적지 않았다. 한편 고종 대에 경복궁 후원의 서쪽 궁장에도 같은 이름의 금화문이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誌)』
  •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
  •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1, 서울학연구소, 1994.
      1. 그림1_00017961_「동궐도」, 창덕궁 내각 서쪽 담장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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