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건(網巾)"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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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를 튼 후 이마에 두르는 머리띠.
 
상투를 튼 후 이마에 두르는 머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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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0:44 기준 최신판



상투를 튼 후 이마에 두르는 머리띠.

개설

상투를 튼 후 흘러내리는 머리를 걷어 올려 정리하기 위해 이마에 두르는 머리띠이다. 관례(冠禮)와 더불어 사용하기 시작하여 죽어서까지 사용한다.

연원 및 변천

『명사(明史)』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太祖)가 미행(微行)을 하다가 신관(新觀)에 이르러 도사가 망건을 맨 것을 보고, 이것을 취하여 반포하였다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도사의 차림새라고도 하였다(『고종실록』 25년 10월 28일).

조선초기부터 사용하였다. 당줄을 꿰어 망건을 단단하게 묶기 위해 사용된 관자(貫子)는 1~3품은 금이나 옥으로 단다고 규정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점차 사치가 심해져 품계에 관계없이 관자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승정원에서 사치와 참람함을 금하고자 올린 규정에 이속(吏屬), 서인(庶人), 복례(僕隷) 등이 사용하는 망건의 장식과 자질구레한 물건도 금하라고 한 조령을 통해 확인된다(『성종실록』 6년 7월 17일).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보면 처음에는 망건을 명주실로 만들다가 명나라 만력(萬曆, 1572~1620) 연간에 와서 머리카락이나 말총 등을 대신 쓰게 되었다고 한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망건도 사라졌다.

형태

『조선상식(朝鮮常識)』을 살펴보면, 망건의 구성 및 착용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망건은 말총으로 만드는데, 앞의 그물 같은 부분은 ‘앞’, 상부의 졸라매는 부분은 ‘당’, 이마에 둘려지는 아랫단은 편자[邊子], 뒷면의 뒤통수를 싸는 부분을 ‘뒤’라고 한다. 앞부분만 인모나 낙타미를 사용하여 곱게 만들기도 했다. 당에 많은 고리를 달고 그 구멍에 가는 당줄을 꿰어 뒤에서 조인 후 상투에 잡아매며, 밑변인 편자 양끝에 튼튼한 당줄을 달아 편자 뒷부분에 달린 관자에 좌우 당줄을 교차시켜 고정시킨 후 다시 망건 뒤로 가지고 가서 묶는다.

망건에 관자를 달기 시작한 것은 망건 줄을 꿰기 위한 것으로 망건의 시작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정조실록』 12년 10월 3일). 관자는 금·은·옥 등으로 만들며, 직품을 나타내기도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품은 만옥(漫玉)으로 만든 반옥환중(反玉環中)을, 2품은 금으로 나팔꽃·매화·오얏꽃 등을 그린 쌍반권·반금권 등을 하였으며, 3품은 옥에 나팔꽃·매화 등을 새긴 수팔연환자(鎪八蓮環子)를 쓴다고 했다. 또 『조선상식』에는 서민에서 당하 3품까지는 골(骨)·각(角)·대모(玳瑁)·마노(瑪瑙)·호박(琥珀) 등을 썼으며, 정3품 당상관은 옥관자로 크기가 크며 화(花)·죽(竹)·연(蓮) 등을 조각했다고 하였다. 2품은 금관자를 사용하는데 종2품은 크게 만들어 조각하였으며, 정2품은 조각하지 않은 도리금 관자를 했다. 1품은 옥관자를 하는데 정3품 당상관과 달리 질이 좋고 무늬가 없는 도리옥이나 둥근 환옥을 썼다. 품계가 높아질수록 조각 장식이 없는 작고 소박한 옥관자를 최상의 관자로 여겼다. 직품을 구분하는 것 외에도 당줄을 걸어 망건을 단단하게 묶기 위한 것으로 관자를 달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볼 때 관자의 용도는 망건을 단단히 묶기 위한 목적이 우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망건에 달린 풍잠(風簪)은 바람이 불어 갓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달기 시작한 것으로 처음 망건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옥·밀화(蜜花)·우각(牛角)·대모 등으로 만들었다. 관자와 달리 직품을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남성의 사치품으로서 풍잠에 무늬를 새겨 멋을 내기도 했다. 풍잠 안쪽에는 4개의 구멍이 있어 실을 꿰어 망건에 달 수 있도록 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평상시 망건은 말꼬리를 이용하여 그물처럼 맺는다. 그러나 습의용(襲衣用)으로 사용하는 망건은 검은 비단으로 대용한다[『세종실록』 오례 흉례의식 습]. 『일성록(日省錄)』 에도 습(襲)에 사용된 망건으로 흑초(黑綃)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상변통고(常變通攷)』에 의하면, 관에 흰색을 사용한다면 옷도 그 색을 따름이 마땅하고 망건도 베로 만드는 것이 옳은 듯하다고 하여 상례에는 베로 만든 망건을 사용하였으며, 금·옥 등의 관자도 없앴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상변통고(常變通攷)』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조선상식(朝鮮常識)』
  • 이은주·조효숙·하명은, 『17세기의 무관 옷 이야기』, 민속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