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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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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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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22)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권지 학유(權知學諭)로 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마침 고향 광주(光州)에 돌아와 있던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형 고종후와 함께 광주 일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 가서 목사(牧使)[[권율(權慄)]]에게 이들을 넘겨주고 평양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길이 막혀 더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전라도로 돌아왔다.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이 담양(潭陽)에서 회동할 때,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이 고경명을 전라도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형과 함께 아버지를 도왔다. 고경명은 군사를 정돈하여 북상할 계획을 세우고 여산(礪山)에 진주하여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마침 왜적이 금산(錦山)을 점령하였는데, 전주(全州)가 함락될 위급한 처지가 되었으므로, 먼저 금산의 왜구를 쳐서 전라도를 구원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경명이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에 당도하여, [[방어사(防禦使)]]곽영(郭嶸)과 연합하여 진영(陣營)을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누고, 의병이 먼저 돌격하여 토성(土城)의 사면에서 적병을 포위 공격하니, 왜적이 사상자가 많이 나서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의병은 방어군을 도와서 함께 싸웠는데, 왜적이 먼저 관군(官軍)을 공격하자, 방어사의 관군이 놀라서 무너졌다. 뒤따라 의병도 무너지면서 고경명은 적의 칼에 맞아 유팽로와 같이 전사하였다. 그때 고인후는 군사의 앞 대열에 서서 의병을 독려하면서 싸웠는데, 군사의 대열이 무너지자, 말에서 급히 내려 부오(部伍)를 정리하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1592년 7월 전사할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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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22)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권지 학유(權知學諭)로 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마침 고향 광주(光州)에 돌아와 있던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형 고종후와 함께 광주 일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 가서 목사(牧使)[[권율(權慄)]]에게 이들을 넘겨주고 평양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길이 막혀 더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전라도로 돌아왔다.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이 담양(潭陽)에서 회동할 때,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이 고경명을 전라도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형과 함께 아버지를 도왔다. 고경명은 군사를 정돈하여 북상할 계획을 세우고 여산(礪山)에 진주하여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마침 왜적이 금산(錦山)을 점령하였는데, 전주(全州)가 함락될 위급한 처지가 되었으므로, 먼저 금산의 왜구를 쳐서 전라도를 구원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경명이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에 당도하여, [[방어사(防禦使)]]곽영(郭嶸)과 연합하여 진영(陣營)을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누고, 의병이 먼저 돌격하여 토성(土城)의 사면에서 적병을 포위 공격하니, 왜적이 사상자가 많이 나서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의병은 방어군을 도와서 함께 싸웠는데, 왜적이 먼저 관군(官軍)을 공격하자, 방어사의 관군이 놀라서 무너졌다. 뒤따라 의병도 무너지면서 고경명은 적의 칼에 맞아 유팽로와 같이 전사하였다. 그때 고인후는 군사의 앞 대열에 서서 의병을 독려하면서 싸웠는데, 군사의 대열이 무너지자, 말에서 급히 내려 부오(部伍)를 정리하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1592년 7월 전사할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과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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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제향'''==
 
=='''묘소와 제향'''==
  
죽은 지 40여 일이 지나서 형 고종후가 승군(僧軍)에게 부탁하여 고경명·고인후 부자의 시신을 찾아서, 전라도 광주(光州) 창평(昌平) 수곡리(壽谷里)에 장사지냈다.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문곡집(文谷集)』권22 「권지학유고공청시행장(權知學諭高公請諡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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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지 40여 일이 지나서 형 고종후가 승군(僧軍)에게 부탁하여 고경명·고인후 부자의 시신을 찾아서, 전라도 광주(光州) 창평(昌平) 수곡리(壽谷里)에 장사지냈다.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문곡집(文谷集)』권22 「권지학유고공청시행장(權知學諭高公請諡行狀)」).
  
 
조정에서는 고인후에게 예조참의를 추증하였고, 그 뒤에 정문(旌門)과 [[사당(祠堂)]]을 세워서 고경명에게 [[사제(賜祭)]]할 때 고인후 형제도 함께 배향(配享)하게 한 다음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숙종(肅宗) 때 ‘의열(毅烈)’이란 시호를 그에게 내려 주었다. 형 고종후는 원수를 갚기 위해 상중(喪中)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복수대장(復讎大將)이 되었는데, 1593년(선조26) 6월 제 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 참여하였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조정에서는 고인후에게 예조참의를 추증하였고, 그 뒤에 정문(旌門)과 [[사당(祠堂)]]을 세워서 고경명에게 [[사제(賜祭)]]할 때 고인후 형제도 함께 배향(配享)하게 한 다음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숙종(肅宗) 때 ‘의열(毅烈)’이란 시호를 그에게 내려 주었다. 형 고종후는 원수를 갚기 위해 상중(喪中)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복수대장(復讎大將)이 되었는데, 1593년(선조26) 6월 제 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 참여하였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2018년 1월 9일 (화) 22:41 기준 최신판




총론

[1561년(명종16)~1592년(선조25) = 3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의병(義兵). 자는 선건(善健)이고, 스스로 호(號)를 학봉(鶴峯)이라 하였다.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이며 복수(復讎) 의병대장 고종후(高從厚)의 동생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22)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권지 학유(權知學諭)로 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마침 고향 광주(光州)에 돌아와 있던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형 고종후와 함께 광주 일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 가서 목사(牧使)권율(權慄)에게 이들을 넘겨주고 평양의 행재소(行在所)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길이 막혀 더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전라도로 돌아왔다.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이 담양(潭陽)에서 회동할 때,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이 고경명을 전라도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형과 함께 아버지를 도왔다. 고경명은 군사를 정돈하여 북상할 계획을 세우고 여산(礪山)에 진주하여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마침 왜적이 금산(錦山)을 점령하였는데, 전주(全州)가 함락될 위급한 처지가 되었으므로, 먼저 금산의 왜구를 쳐서 전라도를 구원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경명이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에 당도하여, 방어사(防禦使)곽영(郭嶸)과 연합하여 진영(陣營)을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누고, 의병이 먼저 돌격하여 토성(土城)의 사면에서 적병을 포위 공격하니, 왜적이 사상자가 많이 나서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의병은 방어군을 도와서 함께 싸웠는데, 왜적이 먼저 관군(官軍)을 공격하자, 방어사의 관군이 놀라서 무너졌다. 뒤따라 의병도 무너지면서 고경명은 적의 칼에 맞아 유팽로와 같이 전사하였다. 그때 고인후는 군사의 앞 대열에 서서 의병을 독려하면서 싸웠는데, 군사의 대열이 무너지자, 말에서 급히 내려 부오(部伍)를 정리하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1592년 7월 전사할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성품과 일화

고인후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지조가 강개하여, 세속의 영욕과 이해득실에는 항시 초연하고 조금도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대단해서 한번 글을 읽으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문장을 잘 지어서 임진왜란 때에 지은 격문(檄文)은 고경명의 수초(手草)가 아니면, 고인후 형제의 손에서 많이 나왔었다. 의병을 일으킬 적에 고경명은 스스로 자기 옷 위에다 이름을 썼는데, 고인후 형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대개 이것은 뒷날 시체를 찾는 데 증표가 되게 하려는 것으로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이 이미 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묘소와 제향

죽은 지 40여 일이 지나서 형 고종후가 승군(僧軍)에게 부탁하여 고경명·고인후 부자의 시신을 찾아서, 전라도 광주(光州) 창평(昌平) 수곡리(壽谷里)에 장사지냈다.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문곡집(文谷集)』권22 「권지학유고공청시행장(權知學諭高公請諡行狀)」).

조정에서는 고인후에게 예조참의를 추증하였고, 그 뒤에 정문(旌門)과 사당(祠堂)을 세워서 고경명에게 사제(賜祭)할 때 고인후 형제도 함께 배향(配享)하게 한 다음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숙종(肅宗) 때 ‘의열(毅烈)’이란 시호를 그에게 내려 주었다. 형 고종후는 원수를 갚기 위해 상중(喪中)의 몸으로 의병을 일으켜 복수대장(復讎大將)이 되었는데, 1593년(선조26) 6월 제 2차 진주성(晉州城) 싸움에 참여하였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문곡집(文谷集)』
  • 『계곡집(谿谷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