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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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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사상)]]
{{집단기구|대표표제=서학|한글표제=서학|한자표제=西學|대역어=|상위어=사부유학(四部儒學), 사학(四學)|하위어=|동의어=서부유학(西部儒學)|관련어=남학(南學), 동학(東學), 미륵사(彌勒寺), 북학(北學), 중학(中學)|분야=교육·출판/교육기관/사부학당|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조준호|설치시기=|폐지시기=|소속관서=예조(禮曹)|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78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11016_001 『태종실록』11년 11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1025_001 『연산군일기』 11년 1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11030_007 『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11월 30일]}}
 
 
 
조선시대에 한성부 서부에 설치되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립 학교.
 
 
 
=='''개설'''==
 
 
 
서학은 예조 속아문인 사학(四學)의 하나로, 서부 유생들의 교육을 위해 설치되었다. 서학에는 [[교수(敎授)]]와 [[훈도(訓導)]]가 배치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재학생 중 성적 우수자를 선발해서 성균관에 올려 교육하게 하였다. 조선전기부터 교육적 성과를 높이기 위한 [[고강(考講)]]이나 [[제술(製述)]] 등의 시험 제도가 운영되었으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유명무실한 채 존속하다가 한말 신교육이 수용되면서 소멸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서학(西學)의 전신은 고려 말에 설치된 서부유학(西部儒學)이다. 조선전기에는 이를 계승해서 운영하였으나, 독립된 공간을 갖지 못하여 사찰인 미륵사(彌勒寺)를 빌려서 사용하였다[『정종실록』 2년 8월 21일]. 이후 1411년(태종 11) 남학(南學)의 건립을 시작으로 동학(東學), 중학(中學), 서학도 독립된 학사가 건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학은 미륵사에서 [[자은종(慈恩宗)]] 경고(京庫)로 이전되었고, 다시 1435년(세종 17) 11월 이곳이 한성부 북부의 구석에 위치하여 유생들의 왕복이 불편하다는 지적에 따라 서부 여경방(餘慶坊: 현재 서울 종로구 세종로나 신문로 일대)에 학사를 건립한 후 이전하였다[『세종실록』 17년 11월 1일].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편으로 사부유학을 사학으로 개칭할 때 서부유학은 서학으로 개칭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서학을 비롯해 사부학당에는 각 학당마다 종6품의 교수(敎授, 敎授官) 2명, 정9품의 훈도 2명씩을 두고 성균관 관원이 겸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1466년 1월 서부유학을 서학으로 개칭하면서는 겸직제를 폐지하고 전임(專任) 관원으로 차출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그러나 서학을 포함한 사부학당 관원은 결원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고[『성종실록』 16년 4월 8일], 수시로 제사의 집사(執事)로 차출하기도 하여[『성종실록』 22년 5월 22일] 학당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서학 등 사학 모두에 승문원과 교서관의 [[권지(權知)]] 관원들을 훈도로 차출하여 교육시키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4년 5월 5일].
 
 
 
서학 등 4학은 모두 10세 이상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15세 이상인 유생들 중 학업이 어느 정도 성취되면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11016_001 『태종실록』11년 11월 16일]). 그러나 초기부터 서학을 포함한 사부학당의 교육적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를 제고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1469년(예종 1) 5월에는 서학 등 사학 유생 중 80명을 선발해서 고강이나 제술 등 시험을 보게 하거나[『예종실록』 1년 5월 6일], [[사헌부(司憲府)]]나 예조(禮曹)가 감찰하게 하는[『성종실록』 14년 2월 27일] 등 다양한 대책이 강구되었으나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변천'''==
 
 
 
연산군대에는 문묘가 철거되면서 이곳에 있던 공자와 맹자의 위판이 서학으로 옮겨지거나([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1025_001 『연산군일기』 11년 1월 25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다가 중종반정 이후 정돈되었다[『중종실록』 1년 12월 4일]. 이후에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전란 이후에 복구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11030_007 『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11월 30일]).
 
 
 
한편 서학 등 사학의 관원은 1654년(효종 5)에는 김익희(金益熙)의 건의로 왕을 측근에서 모신 시종신(侍從臣)을 겸교수(兼敎授)로 차출하도록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채충원(蔡忠元)이 차출되기도 하였다[『효종실록』 5년 10월 4일]. 겸교수 직제는 이후 숙종초에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복구되어 『속대전』에 규정되었다. 영조대에 반포된 『속대전』에는 서학 등 사학은 모두 관원이 축소되어 교수와 훈도 각 1명이 되었다. 서학을 비롯한 사학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거의 교육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유명무실하게 존속하다가 한말 신교육이 수용되면서 없어졌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이광린, 「선초의 사부학당」, 『역사학보』16, 1961.     
 
*피정만, 「조선시대 성균관·사학의 유생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사학』3, 1981.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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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교육·출판]][[분류:교육기관]][[분류:사부학당]][[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
 

2018년 1월 24일 (수) 22:18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