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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국(종묘 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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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국(경원도호부)]]
{{집단기구|대표표제=공작국|한글표제=공작국|한자표제=工作局|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관청|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초기|왕대=조선초기|집필자=이석규|설치시기=1434년(세종 16) 1월|폐지시기=|소속관서=경원도호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06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1015_006 『세종실록』 16년 1월 15일]}}
 
 
 
조선초기 함길도 경원도호부에 설치한 토관의 동반 종7품 아문.
 
 
 
=='''개설'''==
 
 
 
공작국은 1434년(세종 16) 함길도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에 [[토관(土官)]][[동반(東班)]]의 종7품 속사로 처음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후 『경국대전』 토관직의 아문과 같이 명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은 본격적으로 동·서북면 지역을 개척하고 개척지를 방어함과 동시에 북도민을 위무하기 위해 고려말 이래의 토관제를 계승하여 평안도와 함경도의 감영과 요충지인 10여 대도호부, 목, 도호부에 도무사(都務司) 이하 동반속사와 [[진북위(鎭北衛)]] 등 서반 속위를 설치하고 그 각각에 정5품 이하 수십의 문무 토관직을 두어 운영하였다. 이 중 공작국은 경원도호부에 설치된 동반의 종7품 속사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1015_006 『세종실록』 16년 1월 15일]).
 
 
 
=='''조직 및 역할'''==
 
 
 
공작국은 종7품의 주부(注簿) 1명, 종9품의 [[녹사(錄事)]] 1명이 있어 역군을 지휘하여 부내의 각종 공역사를 수행하였다.
 
 
 
=='''변천'''==
 
 
 
함길도와 평안도에 처음 토관이 설치될 때에는 각 변진마다 토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속사의 명칭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의주목과 회령·경원·종성·온성·부령·경흥·강계도호부의 동반 토관속사는 도할서(都轄署)·전례서(典禮署)·융기서(戎器署)·[[사창서(司倉署)]]·전주국(典酒局)·사옥국(司獄局)으로 그 명칭이 통일되어 있고, 공작국은 그 명칭은 물론 그 기능과 관련된 속사가 없다. 이 점에서 공작국은 1485년 이전에 잡다한 속사의 명칭이 통일될 때 그 기능이 이 중의 한 속사에 이관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분류:정치]][[분류:행정]][[분류:관청]][[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초기]][[분류:조선초기]]
 

2018년 1월 24일 (수) 22:09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