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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도사(충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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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도사(감영)]]
{{직역|대표표제=겸도사|한글표제=겸도사|한자표제=兼都事|대역어=|상위어=경력(經歷), 도사(都事), 참하관(參下官)|하위어=|동의어=|관련어=가도사(假都事), 충훈부(忠勳府)|분야=정치/행정/관직·관품|유형=직역|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이근호|제정시기=1865년(고종 2)|폐지시기=1894년|소속관서=충훈부|관품=종오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8296|실록연계=}}
 
 
 
조선후기 공신 관련 사무를 관장하던 충훈부(忠勳府) 소속의 종5품 관직
 
 
 
=='''개설'''==
 
 
 
1865년(고종 2) 7월 홍종서(洪鍾序)의 건의가 관직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 홍종서는 공신 적장자들이 낭관(郎官)이나 수령 등을 지냈는데도 더 이상 진출할 수 있는 관직이 마련되지 않아 관직 임용에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기존 가도사(假都事)를 겸도사로 개칭하여 제수하자고 하였다. 홍종서의 상소가 제출된 다음 날 이병희(李秉羲)가 처음으로 겸도사에 제수되었다. 정원은 1명이었다.
 
 
 
=='''담당 직무'''==
 
 
 
충훈부겸도사는 소속 장이 추천하여 임명하는 자벽과(自辟窠)로, 수령이나 경관직(京官職) 6품 이상을 지낸 사람으로 추천[擬望]하였다. 임기는 30개월로, 이를 마치면 차례대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였다. 임무는 도사와 함께 관서의 제반 서무를 주관하였다.
 
 
 
=='''변천'''==
 
 
 
기록상으로는 1865년의 설치 이후 1889년(고종 26)까지 윤우영(尹宇榮)이 겸도사에 제수된 것이 확인된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임용되다가 1894년 충훈부가 기공국(記功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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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8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