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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도구|대표표제=불랑기|한글표제=불랑기|한자표제=佛狼機|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지화식(持火式) 점화법(點火法), 호준포(虎蹲砲), 후장식(後裝式) 화포(火砲)|분야=정치/군사·국방/병기|유형=물품·도구|지역=|시대=조선|왕대=|집필자=박재광|용도=|재질=|관련의례=|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039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5029_004 『선조실록』 32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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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불랑기|한글표제=불랑기|한자표제=佛狼機|대역어=|상위어=화기(火器)|하위어=자포(子砲)|동의어=|관련어=대포(大砲),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장포(前裝砲), 포르투갈, 프랑코(Franco), 화포(火砲), 홍이포(紅夷砲), 후장포(後裝砲)|분야=정치/군사·국방/병기|유형=개념용어|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후기|왕대=조선후기|집필자=이왕무|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7488|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10027_002 『선조실록』 28년 10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5029_004 『선조실록』 32년 5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10014_002 『광해군일기』 2년 10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503003_001 『현종개수실록』 5년 3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408005_001 『숙종실록』 34년 8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506023_001 『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3일], [http://sillok.history.go.kr/id/krb_10506022_004 『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804014_003 『고종실록』 8년 4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5010_001 『고종실록』 31년 5월 10일]}}
  
임진왜란 때 명에서 도입한  것으로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여 발사시키는 지화식(持火式) 점화법을 사용하는 후장식(後裝式) 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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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이 왜군을 격퇴하면서 사용한 이후 조선에 도입된 유럽형 후장식(後裝式) 화포.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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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불랑기라는 말은 중국과 교역하던 아라비아인들이 서양인을 파랑기(Farangi)라고 부른 데서 생겼는데, 이 말은 중세의 Frank에서 유래했다. 불랑기의 가장 큰 특징은 포가 모포(母砲)로 불리는 포신과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子砲)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포 하나에는 여러 개의 자포가 있으며, 이 자포에는 항상 화약과 탄환이 장전되어 있어서 오늘날의 탄약통(cartridge)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포 사격을 할 경우에 모포의 뒷부분에 있는 자포실(子砲室)에 탄약이 장전된 자포를 끼워서 발사하는 후장식 화포이다. 1호부터 5호까지 다섯 종류가 있었으며, 자포는 모포 1문에 5문에서 9문이 한 세트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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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佛狼機)는 명나라 시대 포르투갈인이 16세기 유럽에서 발명한 후장식 화포를 소개하면서 비롯되었다. 명나라에서 포르투갈인을 지칭하던 프랑코(Franco)를 한자로 표기한 불랑기가 유럽식 화포를 호칭하는 말로 전이되었다.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국, 중국, 일본에 전파되었다. 당시 한·중·일의 화포는 대부분 전장식이던 것에 반해 유럽인이 전달한 화포는 후장식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불랑기였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불랑기를 이용하여 왜군을 격멸시키는 것을 확인한 뒤 이를 조선군의 대표적 화기로 정착시켰으며, 조선말기까지 이용하였다.
  
이 불랑기는 특히 화포의 운용 조작이 매우 간단하였는데, 먼저 모포의 포신 속을 청소한 다음 탄환이 장전된 자포를 자포실에 끼워 넣으면 바로 발사가 가능했다. 또 1차 사격 후에 바로 자포를 재장전하여 사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발사 간격이 매우 짧아 당시의 다른 대포와 비교할 때 사격 속도가 무척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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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특징'''==
  
이런 불랑기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전래되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구저성(臼杵城)의 공방전에서 사용한 적이 있으나,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할 때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고, 활용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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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는 후장식 화포로서 발사체를 사전에 준비해서 장전해 발사하였다. 따라서  발사체인 모포(母砲)와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서 발사하는 자포(子砲)로 구성되었다. 자포가 모포와 분리되어 있어서 여러 개를 미리 준비해서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전장식 화포가 한 번 발사 이후 재차 발사를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했던 것에 비해 불랑기는 지속적인 발사가 가능했으며, 대형 화포가 아닌 소형 화포로서 선회(旋回)가 수월했다. 또한 성(城)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여 발사할 수 있었고 전선(戰船)에서도 위치를 수시로 바꿀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도 불랑기를 배치한 것이 확인된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10027_002 『선조실록』 28년 10월 27일]).
  
우리나라에 불랑기가 들어오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 전투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1592년 12월 하순, 명나라 이여송은 43,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후 이들 명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1593년 1월 6일, 평양성 탈환을 위한 공격을 시작했다. 명군은 호준포·위원포·불랑기 등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한 화포들을 이용하여 성벽과 성문에 집중 공격을 펼쳤다. 그 결과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외곽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평양성의 외성을 점령하였으며, 계속 중성으로 돌입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 군을 만수대와 을밀대 쪽으로 압박하여 끝내 일본군을 물리치고, 평양성을 탈환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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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이후 이덕형(李德馨)이 선조에게 전투 상황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명나라가 사용한 불랑기·호준포 등의 화포의 성능이 뛰어남을 언급했다. 이후 불랑기가 기존 화포에 비해 규모가 작아 전투에서의 효용성이 높고, 성능도 우수하였기 때문에 적극 도입하여 거북선 등에 장착해 전란을 극복하기 위한 신무기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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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랑기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군에 배치되었다. 훈련도감(訓鍊都監) 포수의 시험에도 불랑기를 발사하는 과목이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5029_004 『선조실록』 32년 5월 29일]). 광해군대에는 전일 무과 초시의 포수사목(砲手事目)에 불랑기가 조총 및 백자총(百字銃)과 같이 포함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10014_002 『광해군일기』 2년 10월 14일]). 이후 조정에서는 화기 중에 불랑기가 가장 성능이 좋다고 평가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0503003_001 『현종개수실록』 5년 3월 3일]). 숙종대에도 불랑기가 성곽을 방어하고 적을 공격하는 데 중요한 군기라고 인정하여 지속적으로 제작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3408005_001 『숙종실록』 34년 8월 5일]).
  
이후 불랑기는 조선후기까지 많이 제조되어 활용되었다. 조선의 불랑기는 중국에서 예부터 사용해왔던 포와 비교하여 구경과 포신의 길이를 비교한 수치인 구경장(口徑長)이 크고 또한 포신의 굵기가 일정하였다. 때문에 화약의 폭발가스가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발사된 탄환은 강력한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불랑기는 고정식 포가와 이동용 포가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데, 신헌이 저술한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에는 중국의 『해국도지(海國圖志)』의 마반포차를 응용한 불랑기동차가 나와 있다. 이 불랑기동차는 당시 조선의 주력 화포였던 불랑기의 운반이나 발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포차로서 활차를 이용하여 포를 좌우로 쉽게 움직일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전에 비해 불랑기의 활용도를 더욱 높였다. 또한 포신에 가늠자[照門]과 가늠쇠[照星]를 갖춰 조준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목표에 대한 명중률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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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대는 도성의 전면 방어선이었던 강화도의 방비에도 불랑기를 채택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0506023_001 『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3일]). 당시 강화도 각 보()에 배치된 불랑기는 244좌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rb_10506022_004 『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2일]). 불랑기는 개항 전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고종대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에도 총융청에서 강화도에 불랑기를 보내어 방어하도록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0804014_003 『고종실록』 8년 4월 14일]). 또한 동학군이 전주성에서 싸울 때에도 불랑기가 사용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05010_001 『고종실록』 31년 5월 10일]).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 참전했던 미군의 수기(手記)나 미군이 찍어 간 사진을 보면 조선군의 화포가 불랑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만기요람(萬機要覽)』에 기록된 각 진영의 화기 보유 현황에서도 불랑기가 들어 있는 점으로 보아 불랑기는 구한말까지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례'''==
 
 
 
兵曹啓曰 常時都監砲手 只習鳥銃 不習他放 故只書鳥銃啓之 今承下敎 諸砲中如虎蹲佛狼機等砲 多容丸子 似妨於中數之試 惟三眼銃小勝字銃 可合試才 然欲令解其放法 此四件砲 竝爲書啓 落點試取無妨 鳥銃六柄試放 邊三中及貫一中邊一中以上 殺手三技中 二技上下以上入格者試取 似爲便當([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5029_004 『선조실록』 32년 5월 29일])
 
  
 
=='''참고문헌'''==       
 
=='''참고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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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신기비결(神器祕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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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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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광, 『화염조선』, 글항아리, 2009.       
*『융원필비(戎垣必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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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한국군사사』13, 경인문화사, 2012.       
*국사편찬위원회 편,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경인문화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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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무, 「광해군대 화기도감에 대한 연구」, 『민족문화』21, 1998.       
*박재광, 『화염조선-전통 비밀병기의 과학적 재발견』, 글항아리, 2009.       
 
*이강칠, 『한국의 화포』, 동재, 2004.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1994.       
 
*박재광, 「임진왜란기 조·일 양국의 무기체계에 대한 일고찰」, 『한일관계사연구 6』, 1996.     
 
*박재광, 「임진왜란기 朝·明·日 삼국의 무기체계와 교류」, 『군사 51』, 군사편찬연구소, 2004.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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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기준 최신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이 왜군을 격퇴하면서 사용한 이후 조선에 도입된 유럽형 후장식(後裝式) 화포.

개설

불랑기(佛狼機)는 명나라 시대 포르투갈인이 16세기 유럽에서 발명한 후장식 화포를 소개하면서 비롯되었다. 명나라에서 포르투갈인을 지칭하던 프랑코(Franco)를 한자로 표기한 불랑기가 유럽식 화포를 호칭하는 말로 전이되었다.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국, 중국, 일본에 전파되었다. 당시 한·중·일의 화포는 대부분 전장식이던 것에 반해 유럽인이 전달한 화포는 후장식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불랑기였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이 불랑기를 이용하여 왜군을 격멸시키는 것을 확인한 뒤 이를 조선군의 대표적 화기로 정착시켰으며, 조선말기까지 이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불랑기는 후장식 화포로서 발사체를 사전에 준비해서 장전해 발사하였다. 따라서 발사체인 모포(母砲)와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서 발사하는 자포(子砲)로 구성되었다. 자포가 모포와 분리되어 있어서 여러 개를 미리 준비해서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전장식 화포가 한 번 발사 이후 재차 발사를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했던 것에 비해 불랑기는 지속적인 발사가 가능했으며, 대형 화포가 아닌 소형 화포로서 선회(旋回)가 수월했다. 또한 성(城)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여 발사할 수 있었고 전선(戰船)에서도 위치를 수시로 바꿀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도 불랑기를 배치한 것이 확인된다(『선조실록』 28년 10월 27일).

변천

불랑기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군에 배치되었다. 훈련도감(訓鍊都監) 포수의 시험에도 불랑기를 발사하는 과목이 있었다(『선조실록』 32년 5월 29일). 광해군대에는 전일 무과 초시의 포수사목(砲手事目)에 불랑기가 조총 및 백자총(百字銃)과 같이 포함되었다(『광해군일기』 2년 10월 14일). 이후 조정에서는 화기 중에 불랑기가 가장 성능이 좋다고 평가하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3월 3일). 숙종대에도 불랑기가 성곽을 방어하고 적을 공격하는 데 중요한 군기라고 인정하여 지속적으로 제작하게 하였다(『숙종실록』 34년 8월 5일).

현종대는 도성의 전면 방어선이었던 강화도의 방비에도 불랑기를 채택하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3일). 당시 강화도 각 보(堡)에 배치된 불랑기는 244좌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2일). 불랑기는 개항 전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고종대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에도 총융청에서 강화도에 불랑기를 보내어 방어하도록 했다(『고종실록』 8년 4월 14일). 또한 동학군이 전주성에서 싸울 때에도 불랑기가 사용되었다(『고종실록』 31년 5월 10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박재광, 『화염조선』, 글항아리, 2009.
  • 육군본부, 『한국군사사』13, 경인문화사, 2012.
  • 이왕무, 「광해군대 화기도감에 대한 연구」, 『민족문화』21,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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