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정씨(昭容鄭氏)"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문서 내용을 "*소용정씨(문종) *소용정씨(광해군)"으로 바꿈)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
*[[소용정씨(문종)]]
 
+
*[[소용정씨(광해군)]]
{{인명사전|대표표제=소용정씨|한글표제=소용정씨|한자표제=昭容鄭氏|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후궁|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광해군|집필자=홍연주|자=|호=|봉작=소용(昭容)|시호=|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사망=1623년(인조 1) 3월 12일|본관=동래(東萊)|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증조부=정광보(鄭光輔)|조부=정사룡(鄭士龍)|부=정상헌(鄭象獻)|모_외조=|형제=(오라버니)정지산(鄭之産)|처_장인=(남편)광해군(光海君) →무후|자녀=|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479|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9002_004 『광해군일기』 9년 9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12030_002 『광해군일기』 5년 12월 30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4_003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14_001 『인조실록』 1년 9월 14일]}}
 
 
 
=='''총론'''==
 
 
 
[?~1623년(인조 1) = ?].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의 후궁.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정상헌(鄭象獻)이며, 어머니는 정상헌의 천첩(賤妾)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정순경(鄭純褧)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정사룡(鄭士龍)이다.
 
 
 
=='''광해군의 후궁'''==
 
 
 
정소용(鄭昭容)이 언제 광해군의 후궁으로 입궐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17년(광해군 9) 정숙원(鄭淑媛)이라는 호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전에 이미 숙원의 첩지를 받고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9002_004 『광해군일기』 9년 9월 2일]) 숙원을 거쳐 이후 소용(昭容)에 오른 그녀는 교태를 잘 부리고 일에 익숙하여 출입하는 문서를 관리하고 임금을 대신하여 계하(啓下)하였으므로 광해군의 믿음이 두터웠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12030_002 『광해군일기』 5년 12월 30일])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발하자 정소용은 반정 당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1503014_003 『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14_001 『인조실록』 1년 9월 14일])
 
 
 
=='''묘소와 후손'''==
 
 
 
정소용의 무덤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정소용은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두환, 『광해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     
 
 
 
[[분류:왕족]][[분류:후궁]][[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광해군]]
 

2018년 1월 24일 (수) 22:19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