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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0:44 기준 최신판



상아로 만든 홀(笏).

내용

홀은 본래 손에 드는 수판(手板)인데, 본래는 실용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의례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아홀(牙笏)은 왕비와 왕세자, 백관이 들었는데 왕비와 왕세자의 아홀은 중국 황제가 칙서와 함께 보내온 것이다. 그 예를 보면 1450년(문종 즉위) 8월에 중국 사신이 칙서와 함께 왕의 면복(冕服)과 왕비의 관복(冠服)을 가져왔는데 왕비의 관복 중에 상아홀(象牙笏) 1지(枝)가 포함되어 있었다[『문종실록』 즉위 8월 3일 2번째기사]. 이와 같은 예는 1455년(세조 1)과 1518년(중종 13)에도 있었다.

한편 1617년(광해군 9)에는 광해군의 생모 김씨를 왕비로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자 중국 황제가 조선 국왕의 생모 김씨에게 격식을 깨고 관복과 선물을 보냈는데 비취빛 구슬로 꾸민 칠적관(七翟冠) 1개와 상아홀 1개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고급 채단이 포함되어 있었다(『광해군일기』 9년 11월 9일). 백관들은 1품에서 4품까지 조복(朝服)에 아홀을 들었다.

용례

象牙笏一枝[『문종실록』 즉위 8월 3일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