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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정혜옹주|한글표제=정혜옹주|한자표제=貞惠翁主|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왕족/옹주|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인조|집필자=정주영|자=|호=|봉작= 정혜옹주(貞惠翁主) |시호=|출신=왕족|성별=여자|출생=1584년(선조 17)|사망=1638년(인조 16)|본관=전주(全州)|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증조부= 중종(中宗) |조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부= 선조(宣祖) |모_외조=김인빈(金仁嬪)|형제=(오라버니)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 (언니)정신옹주(貞愼翁主) (남동생)의창군(義昌君) (여동생)정숙옹주(貞淑翁主), 정안옹주(貞安翁主), 정휘옹주(貞徽翁主)|처_장인=|자녀=(1남)윤지(尹墀) (2남)윤구(尹坵)|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295|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5001_010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11018_002 『인조실록』 16년 11월 18일]}}
 
 
 
=='''총론'''==
 
 
 
[1584년(선조 17)~1638년(인조 16) = 55세].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인 [[김인빈(金仁嬪)]]이다. 친오라버니는 의안군(義安君),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이며, 친언니는 정신옹주(貞愼翁主)이다. 친남동생은 의창군(義昌君)이고, 친여동생은 [[정숙옹주(貞淑翁主)]], [[정안옹주(貞安翁主)]], [[정휘옹주(貞徽翁主)]]이다. 부마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해숭위(海嵩慰)[[윤신지(尹新之)]]이다. 인조(仁祖)의 고모이기도 하다.
 
 
 
=='''출생과 혼인생활'''==
 
 
 
1584년(선조 17)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선조와 김인빈의 사이에서 4남 5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선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므로, 선조로부터 친히 『소학(小學)』, 『여훈(女訓)』, 『서사(書史)』 등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정혜옹주의 봉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면서 정혜옹주는 피난 생활을 경험해야 하였다. 당시 정혜옹주는 8세의 어린 나이였는데, 피난길이 어수선하고 말을 준비할 수 없어, 선조가 관리들에게 자원하여 다른 길로 데리고 가서 난리를 피하게 하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내수사(內需司)]] 관원 [[윤백상(尹百祥)]]이 정혜옹주를 모시고 갖은 황해도 산길을 통해 적을 피한 뒤 그해 겨울 의주(義州) 에 이르렀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5001_010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1596년(선조 29) 정혜옹주는 해평 윤씨(海平尹氏)[[윤방(尹昉)]]의 아들 윤신지와 혼인하였는데, 부마 윤신지는 해숭위에 봉해졌다. 그런데 시아버지 윤방은 대표적인 서인(西人)으로,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廢妃)]]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런 가운데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생하자 윤방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고, 정혜옹주와 부마 윤신지 또한 선조가 광해군 대신 김인빈이 낳은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던 일이 더해져서 광해군 대에는 불안에 떨며 살 수밖에 없었다.
 
 
 
인조(仁祖)가 즉위한 후 시아버지 윤방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정혜옹주와 부마 윤신지는 한동안 큰일 없이 지냈으나,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부체찰사(副體察使)였던 윤방의 동생 윤훤(尹暄)이 전쟁 당시 안주(安州)를 빼앗기면서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윤훤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었는데, 정혜옹주가 적극적인 구명 운동을 펼쳤음에도 윤훤은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그리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정혜옹주는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차남 윤구(尹坵)가 남한산성에서 방어에 진력하다가 병들어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32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혜옹주는 이를 슬퍼하다 병이 들어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仁祖)가 정혜옹주에 대해 예장(禮葬)을 하도록 명하자, 신하들이 정혜옹주 외에도 여러 왕족들이 죽었으나 그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다며 반대를 하였으나, 인조는 자신의 명대로 시행토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11018_002 『인조실록』 16년 11월 18일])
 
 
 
=='''묘소 및 후손'''==
 
 
 
정혜옹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제청마을에 부마 윤신지의 묘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정혜옹주는 윤신지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는데, 1남은 [[윤지(尹墀)]]이고, 2남은 윤구이다. 정혜옹주가 1남인 윤지를 낳았을 때, 선조는 기뻐하며 어제(御製) 7언 [[근체시(近體詩)]]를 내려주었다. 한편 윤지의 딸은 김익겸(金益謙)과 혼인하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영의정을 지낸 김만기(金萬基)로 숙종(肅宗)의 정비(正妃)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이다. 차남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은 김만중(金萬重)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서석집(瑞石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택당집(澤堂集)』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     
 
 
 
[[분류:왕족]][[분류:옹주]][[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인조]]
 

2018년 1월 24일 (수) 22:28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