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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유역인 회령·온성·종성·경원·경흥에 설치한 다섯 개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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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에 환구단에서 제천례를 하면서 제사지낸 방위신의 하나로 다섯 군데의 큰 산.
  
 
=='''개설'''==
 
=='''개설'''==
  
5진은 태종대 경원진이 복설된 이후 1434년(세종 16)부터 1450년(세종 32)까지 거의 16년에 걸쳐 설치된 6진 중 마지막에 설치된 부령을 제외하고 경원대도호부, 회령도호부, 온성도호부, 종성도호부, 경흥도호부 등 다섯 곳의 군사 거점지로서의 진을 가리킨다. 5진은 대대로 두만강 유역에 거주해온 여진의 거주지를 빼앗아 설치한 것이다. 이에 5진 성 아래에 여진을 거주하게 하는 대신 그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제공하고, 또 그 대가로 그들에게 일대 여진들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도록 했다. 이로써 조선은 북방 여진에 대한 방비를 미리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성저야인(城底野人)]]이었다. 성저야인은 5진의 번병(藩屛)이 되어 조선의 일차적인 북방 방어선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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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에는 제천례를 제정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국가와 황제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때 환구단에 황천상제(皇天上帝), 황지지(皇地祗), 일(日), 월(月), 풍운뇌우(風雲雷雨)와 북두칠성(北斗七星) 등 성신과 더불어 산천의 신인 오악(五岳), 오진(五鎭), [[사해(四海)]], [[사독(四瀆)]]의 신에도 제사를 지냈다.
  
=='''설립 경위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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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특징'''==
  
조선초기 두만강 주변의 접경지대에는 야인들의 침입이 잦았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1434년(세종 16)부터 16년에 걸쳐 6진을 설치하였으나, 야인들은 침입을 멈추지 않았다. 신료들은 경원진을 후퇴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영토 개척에 진취적이었던 세종은 오히려 경원진의 서쪽에 다른 진 하나를 더 설치했다. 이것이 1432년 석막상평(石幕上平)에 설치된 두 번째의 군사 거점지 영북진(寧北鎭)이었다. 영북진이 설치된 2년 후인 1434년에 기왕의 경원진은 두만강 유역의 회질가(會叱家)로 옮기고 벽성(壁城)이 설치된 오음회는 회령진(會寧鎭)으로서 도호부가 되었다. 영북진은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겨졌다. 1435년에 회령의 호를 분할하여 종성군(鍾城郡)을 설치했다. 또 고경원이 위치했던 공주(孔州)는 1437년에 경흥군(慶興郡)으로 승격되었다. 1440년(세종 22)에 다온신읍(多溫新邑)을 온성군(穩城郡)이라 부르도록 했다. 경원은 1437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처음 군이었던 종성과 온성은 1441년 5월에, 경흥은 1443년 8월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것이 행정적으로는 경원대도호부를 포함해 5도호부이면서 군사 거점지로서의 5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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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산과 바다에 천지제사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고유 권한으로, 대한제국기에는 제천단인 환구단을 짓고 오악을 비롯하여, 오진, 사해, 사독에 제사를 지냈다.
  
=='''조직 및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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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에서 오진은 1층에 모신 황천상제와 황지지, 2층에 모신 야명(夜明)과 [[대명(大明)]], 3층에 모신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백(雷伯), 북두칠성, 오성, 이십팔숙, 주천성진(周天星辰)과 같은 자연신과 함께, 땅과 바다, 천을 관장하는 신인 오악, 사해, 사독과 함께 배향되었다.
  
5진이 설치됨으로써 야인에 대한 적극적인 방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종은 군사 거점지로서의 진을 설치하고 그곳의 야인들을 강 밖으로 내몰고, 진의 방어를 강화해 그들의 침입에 대비했다. 5진이 설치된 지역은 본래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 5진의 설치는 대대로 두만강 유역에 거주해온 야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자신들의 거주지를 빼앗기는 일인 셈이었다. 따라서 거주지를 강제로 빼앗겨 불만스러운 야인들을 조선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무마할 필요가 있었다. 또 그래야만 야인들의 침입이 줄어들 것이었다. 당시의 야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쌀, , 옷감 등 생활에 필요한 물자였다. 5진의 설치로 국방체제가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그곳의 야인들을 철저하게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부령을 제외한 5진 성 아래에 야인들을 거주하게 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내어 주었다. 이 경우 물건을 공짜로 주지는 않았다. 물자를 받아가는 야인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조선에서 야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조선을 침입하지 않을 것과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다른 여진 종족의 동향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조선은 5진 성 아래의 야인들로 하여금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북방 종족의 동향을 보고받아 그 대비책을 미리 강구하고자 했다. 이로써 5진 성 아래에 거주하는 야인들은 조선의 번병이 되어, 조선의 일차적인 북방 방어선이 되었다. 이들이 바로 성저야인이었다. 5진의 성저야인은 진의 울타리가 되어 보고 듣는 바를 조선에 고하였다. 따라서 5진에는 방어를 강화하는 조치가 이루어짐과 함께 성저야인들을 접대하고 그들에게 줄 물자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이들을 접대하는 비용은 국고로 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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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풍운뇌우와 산천의 신을 종향위로 삼은 갑오개혁기보다 더 많은 신들을 섬긴 것이다. 대명과 야명 외에도 성신으로 북두칠성, 오성, 이십팔수, 주천성신을 모셨으며, 오악, 오진, 사독, 사해와 함께 명산, 대천, 성황도 모셔 대상 신이 훨씬 세분화된 것이다. 이 가운데 풍운뇌우와 성황은 조선시대의 제천단이던 남단에서 제향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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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을 포함해 오악, 사해, 사독을 모신 것은 공간 개념의 변화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악, 진, 해, 독 가운데에서 진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환구단에서 악, 진, 해, 독을 오방에 맞추어 체계화함으로써 오방 개념이 확실하게 적용되었다.
  
 
=='''변천'''==
 
=='''변천'''==
  
성종대를 지나 중종대를 거치면서 성저야인은 점차 발전했다. 이들은 필요한 물자를 조선으로부터 공급받으면서 여러 여진 종족의 동향을 알려주는 간첩활동을 했던 것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할 만큼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반면 조선은 이들의 배반 기미에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감행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경제적, 군사적 약화로 인한 소극적인 대응만을 강구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조선과 야인 사이의 이러한 관계의 역전은 선조대 5진 [[번호(藩胡)]]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명종대 이후 번호라 불린 성저야인들은 이때에 이르러 조선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란하거나, 혹은 조선을 침입하는 심처호(深處胡)에 동조했다. 보통 여진으로서 5진 인근에 사는 성저야인으로서 조선과 교역을 하고 공물을 바친 부류를 번호라 했으며, 접경지대에서는 다소 멀리 떨어져 살며 조선과 교류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던 야인을 심처호라 하였다. 심처호는 조선뿐 아니라 성저야인들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므로 그들은 결국 조선에 등을 돌리고 자신들을 공격하는 심처호인 홀라온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누르하치에게 귀부했다. 조선의 5진의 번호는 붕괴했고, 번호 정책은 더 이상 관철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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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제를 거행한 대한제국 초기에는 오악을 비롯하여 오진, 사해, 사독의 신위가 명목으로만 존재하고 있었을 뿐 각각에 해당하는 산천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1903년(광무 7)에 이르러 각 지역의 해당 산천을 정하게 되었다. 이때 정해진 오진은 동진(東鎭)은 강릉의 오대산(五臺山), 남진(南鎭)은 보은의 속리산(俗離山), 중진(中鎭)은 서울의 백악산(白岳山), 서진(西鎭)은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 북진(北鎭)은 경성(鏡城)의 장백산(長白山)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순남, 「조선전기 5진 藩胡 동향의 추이」, 『역사와 실학』4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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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의궤(圜丘壇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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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梅泉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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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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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환구제)에 관한 연구」, 『종교연구』30, 2003.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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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3 판



대한제국기에 환구단에서 제천례를 하면서 제사지낸 방위신의 하나로 다섯 군데의 큰 산.

개설

대한제국기에는 제천례를 제정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국가와 황제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때 환구단에 황천상제(皇天上帝), 황지지(皇地祗), 일(日), 월(月), 풍운뇌우(風雲雷雨)와 북두칠성(北斗七星) 등 성신과 더불어 산천의 신인 오악(五岳), 오진(五鎭), 사해(四海), 사독(四瀆)의 신에도 제사를 지냈다.

내용 및 특징

신성한 산과 바다에 천지제사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고유 권한으로, 대한제국기에는 제천단인 환구단을 짓고 오악을 비롯하여, 오진, 사해, 사독에 제사를 지냈다.

환구단에서 오진은 1층에 모신 황천상제와 황지지, 2층에 모신 야명(夜明)과 대명(大明), 3층에 모신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백(雷伯), 북두칠성, 오성, 이십팔숙, 주천성진(周天星辰)과 같은 자연신과 함께, 땅과 바다, 천을 관장하는 신인 오악, 사해, 사독과 함께 배향되었다.

이는 풍운뇌우와 산천의 신을 종향위로 삼은 갑오개혁기보다 더 많은 신들을 섬긴 것이다. 대명과 야명 외에도 성신으로 북두칠성, 오성, 이십팔수, 주천성신을 모셨으며, 오악, 오진, 사독, 사해와 함께 명산, 대천, 성황도 모셔 대상 신이 훨씬 세분화된 것이다. 이 가운데 풍운뇌우와 성황은 조선시대의 제천단이던 남단에서 제향하던 것이었다.

오진을 포함해 오악, 사해, 사독을 모신 것은 공간 개념의 변화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악, 진, 해, 독 가운데에서 진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환구단에서 악, 진, 해, 독을 오방에 맞추어 체계화함으로써 오방 개념이 확실하게 적용되었다.

변천

환구제를 거행한 대한제국 초기에는 오악을 비롯하여 오진, 사해, 사독의 신위가 명목으로만 존재하고 있었을 뿐 각각에 해당하는 산천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1903년(광무 7)에 이르러 각 지역의 해당 산천을 정하게 되었다. 이때 정해진 오진은 동진(東鎭)은 강릉의 오대산(五臺山), 남진(南鎭)은 보은의 속리산(俗離山), 중진(中鎭)은 서울의 백악산(白岳山), 서진(西鎭)은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 북진(北鎭)은 경성(鏡城)의 장백산(長白山)이다.

참고문헌

  • 『환구단의궤(圜丘壇儀軌)』
  • 『매천야록(梅泉野錄)』
  •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 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환구제)에 관한 연구」, 『종교연구』30,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