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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재|대표표제=백토|한글표제=백토|한자표제=白土|대역어=|상위어=백악(白堊), 약재(藥材)|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문화/의학·약학|유형=약재|지역=|시대=|왕대=|집필자=강연석|산지=경상도|채취시기=시기 무관|효능=남자수장냉(男子水臟冷), 여자자궁냉(女子子宮冷), 졸폭해수(卒暴咳嗽), 풍적난안(風赤爛眼), 반위사리(反胃瀉痢)에 효과|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1077|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4021_011 『세종실록』 5년 4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001029_001 『선조실록』 10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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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백토|한글표제=백토|한자표제=白土|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백점토(白粘土)|관련어=관요(官窯), 분원(分院), 사옹원(司饔院) 사기소(沙器所)|분야=문화/예술/미술|유형=개념용어|지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박경자|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8101|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ga_10907103_001 『세조실록』 9년 윤7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06007_001 『세조실록』 12년 6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502005_001 『중종실록』 25년 2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501002_001 『숙종실록』 35년 1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706004_003 『영조실록』 17년 6월 4일]}}
  
카올리나이트[Al2Si2O5(OH)4]를 주체로 하는 백색 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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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석과 알루미나가 주성분인, 철분 등의 불순물이 거의 섞여있지 않은 백자의 원료.
  
 
=='''개설'''==
 
=='''개설'''==
  
백토(白土)는 남자의 생식기와 고환 부위가 차게 되는 증상[男子水臟冷], 여자의 자궁 냉증[女子子宮冷], 발작적으로 하는 기침[卒暴咳嗽], 눈에 눈물이 많고 눈이 붉어지며 눈 주위가 헤지는 증상[風赤爛眼], 위가 뒤집힐 듯이 아프고 이질 설사가 잦은 증상[反胃瀉痢]에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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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토(白土)는 백자의 원료이다. 주성분이 규석과 알루미나이고 철분 등의 불순물이 거의 섞여있지 않다. 백자의 태토 외에 도자기의 장식 재료로서 고려시대 청자와 조선시대 분청사기에 사용되었다. 관요에서는 왕실용과 공용의 백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원료와 연료를 국가 비용으로 조달하였다. 백토는 백자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이기 때문에 관요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정부에서 관리하였다. 백토의 산출처(産出處)는 전국에 걸쳐 분포하였는데 특히 강원도 원주와 양구, 충청도 서산, 경상도 경주와 진주, 평안도 선천 등이 유명하였다. 여러 지역의 산지에서 백토를 굴취하고 분원(分院)까지 운송하는 것은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부역(賦役)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토맥(土脈)이 산의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굴취 과정에서 흙이 무너져 내려 백성들이 압사하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백토 굴취 방식은 1717년(숙종 43)에 별도의 인부를 고용하는 것으로 개선되었고, 분원의 운영이 민영화된 이후인 1894년(고종 31)에는 사옹원에서 백토를 확보하고 정련하는 비용으로 받는 쌀을 돈으로 대체하여 분원의 장인(匠人)과 공인(工人)이 현지에 가서 직접 구매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산지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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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특징'''==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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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대에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이 왕명을 받고 여러 지역에서 확보한 백토와 백자에 문양을 그리는 안료로 추정되는 여러 지역의 광물을 바쳤는데, 경상도 진보현(眞寶縣)의 심중청(深重靑), 밀양부(密陽府)와 의성현(義城縣)의 ‘회회청과 비슷한 돌[回回靑相似石]’, 그리고 웅천현(熊川縣)의 빛이 나는 백토[有光白土] 등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907103_001 『세조실록』 9년 윤7월 3일]). 이는 관요의 설치가 시작된 1466년(세조 12) 이전에 이미 백자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청화백자의 제작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1466년에는 백토의 산출처를 문서로 작성하여 관리하고 이미 번조된 것과 진상용을 제외한 백자 제작을 금지하는 명령과 함께 여러 지방에서 상납하는 공물(貢物) 목록에서 백자를 제외하는 조치가 내려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06007_001 『세조실록』 12년 6월 7일]). 이것은 원료인 백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백자의 제작 체계를 단일화한 것으로 관요 설치 직전의 사전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약재화 방식 및 효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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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수시로 채취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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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이후 백토의 수급은 전국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1650년(중종 25)에는 사기를 번조하기 위해 경기도 사현(沙峴)과 양근, 충청도의 백점토를 사용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502005_001 『중종실록』 25년 2월 5일]). 1653년(효종 4)에는 강원도 원주의 백토를, 1690년(숙종 16)에는 경상도 경주와 진주, 평안도 선천의 백토를 사용하였다. 1696년(숙종 22)에는 강원도 양구와 충청도 충주의 백토를, 1697년(숙종 23)에는 경상도 진주의 백토를 사용하였다. 1701년(숙종 27)에는 양구·선천·충주·경주의 백토를, 1723년(경종 3)에는 경상도 곤양·하동의 백토를 사용하였다.
  
여자가 추워하다가 열이 나는 것, 온몸 여기저기에 생기는 덩어리들, 월경이 중단된 것, 음부가 부으면서 아픈 것, 자궁 출혈, 불임증, 설사, 이질을 치료한다. 코끝이 벌건 것, 피를 토하는 것 등도 치료한다. 장기간 먹으면 오장이 상하고 몸이 여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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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백토는 토맥에서 굴취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고, 분원으로 운송하는 문제까지 더하여 해당 지역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이는 양질의 백토 산출 지역인 강원도 양구군에서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백토 굴취를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번복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비용 문제, 험난한 작업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와 부역민들이 압사한 일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3501002_001 『숙종실록』 35년 1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706004_003 『영조실록』 17년 6월 4일]).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1894년(고종 31)에는 백토와 그것을 정련하는 비용으로 정해진 쌀을 돈으로 수납한 후에 분원의 사기 장인과 공인이 현지에서 구매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의하면 탕약에는 넣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약에 넣을 때에는 구워서 쓴다고 하였다. 원래는 그림 그릴 때 쓰며, 흰 사기그릇을 만들 때도 사용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따르면 독성이 없고, 장이 무력해서 대변이 새는 증상을 치료하고[澁腸], 이질 설사를 그치게 하는[止痢] 효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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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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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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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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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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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세종실록』에는 황해도 지방 사람들이 굶주릴 때 쌀가루에 백토를 섞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4021_011 『세종실록』 5년 4월 21일]). 『선조실록』에는 전염병이 돌 때 백성들이 백토로 문 밖과 벽에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백토가 식용 이외에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쓰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001029_001 『선조실록』 10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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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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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본초강목(本草綱目)』     
 
*『동의보감(東醫寶鑑)』     
 
*강병수 외, 『(원색)한약도감: 임상을 위한 한약활용의 필독지서』, 동아문화사, 2008.    
 
*우석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방제학교실, 『(운곡)한약재의 기원 및 산지 총람』, 한국학술정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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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5 판



규석과 알루미나가 주성분인, 철분 등의 불순물이 거의 섞여있지 않은 백자의 원료.

개설

백토(白土)는 백자의 원료이다. 주성분이 규석과 알루미나이고 철분 등의 불순물이 거의 섞여있지 않다. 백자의 태토 외에 도자기의 장식 재료로서 고려시대 청자와 조선시대 분청사기에 사용되었다. 관요에서는 왕실용과 공용의 백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원료와 연료를 국가 비용으로 조달하였다. 백토는 백자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이기 때문에 관요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정부에서 관리하였다. 백토의 산출처(産出處)는 전국에 걸쳐 분포하였는데 특히 강원도 원주와 양구, 충청도 서산, 경상도 경주와 진주, 평안도 선천 등이 유명하였다. 여러 지역의 산지에서 백토를 굴취하고 분원(分院)까지 운송하는 것은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부역(賦役)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토맥(土脈)이 산의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굴취 과정에서 흙이 무너져 내려 백성들이 압사하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백토 굴취 방식은 1717년(숙종 43)에 별도의 인부를 고용하는 것으로 개선되었고, 분원의 운영이 민영화된 이후인 1894년(고종 31)에는 사옹원에서 백토를 확보하고 정련하는 비용으로 받는 쌀을 돈으로 대체하여 분원의 장인(匠人)과 공인(工人)이 현지에 가서 직접 구매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내용 및 특징

세조대에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이 왕명을 받고 여러 지역에서 확보한 백토와 백자에 문양을 그리는 안료로 추정되는 여러 지역의 광물을 바쳤는데, 경상도 진보현(眞寶縣)의 심중청(深重靑), 밀양부(密陽府)와 의성현(義城縣)의 ‘회회청과 비슷한 돌[回回靑相似石]’, 그리고 웅천현(熊川縣)의 빛이 나는 백토[有光白土] 등이었다(『세조실록』 9년 윤7월 3일). 이는 관요의 설치가 시작된 1466년(세조 12) 이전에 이미 백자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청화백자의 제작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1466년에는 백토의 산출처를 문서로 작성하여 관리하고 이미 번조된 것과 진상용을 제외한 백자 제작을 금지하는 명령과 함께 여러 지방에서 상납하는 공물(貢物) 목록에서 백자를 제외하는 조치가 내려졌다(『세조실록』 12년 6월 7일). 이것은 원료인 백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백자의 제작 체계를 단일화한 것으로 관요 설치 직전의 사전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변천

관요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이후 백토의 수급은 전국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1650년(중종 25)에는 사기를 번조하기 위해 경기도 사현(沙峴)과 양근, 충청도의 백점토를 사용하였다(『중종실록』 25년 2월 5일). 1653년(효종 4)에는 강원도 원주의 백토를, 1690년(숙종 16)에는 경상도 경주와 진주, 평안도 선천의 백토를 사용하였다. 1696년(숙종 22)에는 강원도 양구와 충청도 충주의 백토를, 1697년(숙종 23)에는 경상도 진주의 백토를 사용하였다. 1701년(숙종 27)에는 양구·선천·충주·경주의 백토를, 1723년(경종 3)에는 경상도 곤양·하동의 백토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백토는 토맥에서 굴취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고, 분원으로 운송하는 문제까지 더하여 해당 지역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이는 양질의 백토 산출 지역인 강원도 양구군에서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백토 굴취를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번복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비용 문제, 험난한 작업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와 부역민들이 압사한 일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숙종실록』 35년 1월 2일), (『영조실록』 17년 6월 4일). 이러한 문제들로 인하여 1894년(고종 31)에는 백토와 그것을 정련하는 비용으로 정해진 쌀을 돈으로 수납한 후에 분원의 사기 장인과 공인이 현지에서 구매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