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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육조(六曹)에 소속된 정7품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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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평안도와 함경도의 토관직으로 설치한 관직
  
 
=='''개설'''==
 
=='''개설'''==
  
조선 건국 직후 육조 소속 관직으로 설치되었다가 이후 1395년(태조 4)에 혁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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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나 평안도 등지에 설치된 토관직의 하나로 설치된 관직으로 인원은 정해져 있다. 또한 해당 인원 중 소수이지만 7품관으로 거관(去官)하기도 하였다. 지역 현안에 대한 검찰을 담당하였다.
  
 
=='''담당 직무'''==
 
=='''담당 직무'''==
  
① 육조에 소속되어 관서의 실무를 주로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95년 폐지된 이후 일부 관서에 주사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442년(세종 24)에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위해 첨사원을 설치하고 주사 2명을 설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407028_002 『세종실록』 24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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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와 함경도의 토관직으로 설치된 주사에는 각각의 임무가 앞에 붙어 형방주사(刑房主事) 혹은 육방(六房) 주사(主事) 등으로 불렸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2905012_003 『세종실록』 29년 5월 12일]). 평양부의 경우 1448년에 인원을 조정하여 종전 89명에 1명을 추가하여 모두 90명으로 하고 매 30명당 1명은 7품으로 거관하게 하였다. 함흥부의 경우 종전 56명에서 4명을 추가하여 모두 60명으로 하고 매 30명당 1명씩 7품으로 거관하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001018_002 『세종실록』 30년 1월 18일]). 이어 1449년에 함경도의 경성부(鏡城府)에, 1451년(문종 1)에 평안도의 의주목(義州牧)에, 1458년(세조 4)에 평안도의 영변부(寧邊府)에, 1465년(세조 11)에 개성부 등지에 토관직으로 역시 주사를 설치하였다. 토관의 주사직은 해당 지역 현안을 검찰하는 역할을 맡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7014_004 『세조실록』 2년 7월 14일]).
  
 
=='''변천'''==
 
=='''변천'''==
  
1392년(태조 1) 7월 28일에 관제 반포된 이조(吏曹)를 비롯한 육조에 정7품으로 각 2명씩 설치되었다. 1395년 2월 13일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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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와 평안도 등지에 토관직으로 설치되었던 주사는 15세기 말 토관직이 소멸되면서 함께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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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8 판



조선전기 평안도와 함경도의 토관직으로 설치한 관직

개설

함경도나 평안도 등지에 설치된 토관직의 하나로 설치된 관직으로 인원은 정해져 있다. 또한 해당 인원 중 소수이지만 7품관으로 거관(去官)하기도 하였다. 지역 현안에 대한 검찰을 담당하였다.

담당 직무

평안도와 함경도의 토관직으로 설치된 주사에는 각각의 임무가 앞에 붙어 형방주사(刑房主事) 혹은 육방(六房) 주사(主事) 등으로 불렸다(『세종실록』 29년 5월 12일). 평양부의 경우 1448년에 인원을 조정하여 종전 89명에 1명을 추가하여 모두 90명으로 하고 매 30명당 1명은 7품으로 거관하게 하였다. 함흥부의 경우 종전 56명에서 4명을 추가하여 모두 60명으로 하고 매 30명당 1명씩 7품으로 거관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0년 1월 18일). 이어 1449년에 함경도의 경성부(鏡城府)에, 1451년(문종 1)에 평안도의 의주목(義州牧)에, 1458년(세조 4)에 평안도의 영변부(寧邊府)에, 1465년(세조 11)에 개성부 등지에 토관직으로 역시 주사를 설치하였다. 토관의 주사직은 해당 지역 현안을 검찰하는 역할을 맡았다(『세조실록』 2년 7월 14일).

변천

함경도와 평안도 등지에 토관직으로 설치되었던 주사는 15세기 말 토관직이 소멸되면서 함께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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