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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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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사회)]]
{{집단기구|대표표제=마계|한글표제=마계|한자표제=馬契|대역어=|상위어=계(契)|하위어=|동의어=|관련어=공인계(貢人契)|분야=사회/향촌/계|유형=집단·기구|지역=|시대=|왕대=|집필자=김현영|설치시기=|폐지시기=|소속관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936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ua_11104115_002 『영조실록』 11년 윤4월 15일]}}
 
 
 
1707년에 용산에 사는 말을 가진 사람들이 정부의 공적인 수송에 응하기 위하여 만든 계.
 
 
 
=='''개설'''==
 
 
 
조선후기에는 국가에서 한강 주변의 공적인 수송을 위하여 말을 모아 역을 제공하게 하고 주변의 주민들에게 세를 거두어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공적으로 수납(輸納)할 것이 있으면 한강 연안에 사는 부민(富民)들이 말을 모아서 계(稧)를 만들어 이에 대한 역을 담당[支應]하였는데, 이를 마계(馬契)라고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원래 정부 공용 물자를 운반하는 태운역(駄運役)은 조선초기부터 정식화된 [[방역(坊役)]]으로 한성부의 공방(工房)이 이를 관장하였다. 각 아문에서 운반할 물건이 있을 경우 한성부에 공문을 보내면, 한성부에서 태가(駄價), 즉 운반비를 정한 후에 해당 부(部)에 지시하여 방민(坊民)을 정하고 이를 거행하였다. 처음에는 도성 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방민에게 부과되었는데, 17세기 이후에는 점차 강가에 거주하는 방민에게만 부과되었다.
 
 
 
=='''조직 및 역할'''==
 
 
 
마계는 크고 작은 [[국역(國役)]]에서 태운역을 담당하는 공인계(貢人契)로 창설되었다. 마계는 세곡 하역과 창고에의 납부를 담당하였던 모민계(募民契)와는 달리 정부의 공용 물자를 운송하여 운반비를 정식으로 [[호조(戶曹)]]에서 지급 받는 별무공인계(別貿貢人契)로 성립하였다. 그러나 마계 운영권을 장악한 권력과 유착된 자들은 비변사로부터 유리한 규정을 마련하고 한성부와 결탁하여 마계 재정의 안정화 방안을 마련하였다. 즉 강변 주민 가운데 역을 담당해야 하는 응역호(應役戶) 1호(戶)당 돈 3냥씩을 징수하여 그 노역을 보상 받는 방식에서 역(役)의 유무를 떠나 총 호수를 계산하여 돈을 거두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이에 방민들이 무리를 불러 모아 계인(契人)의 집에서 난동을 일으켰고 군문(軍門)에 예속된 자들도 이에 참여하였다. 이른바 경강민의 마계 습격 사건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1104115_002 『영조실록』 11년 윤4월 15일]).
 
 
 
=='''변천'''==
 
 
 
마계는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운부계(運負契)와 통합되어 세마운부계(貰馬運負契)가 되었다.
 
 
 
=='''참고문헌'''==     
 
*고동환, 『조선 후기 서울 상업 발달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8.     
 
*김동철, 「18세기 방역제(坊役制)의 변동과 마계의 성립 및 도고화(都賈化) 양상」, 『한국문화연구』1, 1988.     
 
 
 
[[분류:사회]][[분류:향촌]][[분류:계]][[분류:집단·기구]]
 

2018년 1월 24일 (수) 22:12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