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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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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교육)]]
{{집단기구|대표표제=남학|한글표제=남학|한자표제=南學|대역어=|상위어=사학(四學)|하위어=|동의어=|관련어=겸교수(兼敎授), 동학(東學), 서학(西學), 중학(中學)|분야=교육·출판/교육기관/사부학당|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조준호|설치시기=1411년(태종 11)|폐지시기=|소속관서=사학(四學)|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03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06029_002 『태종실록』 11년 6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11016_001 『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01015_001 『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11016_001 『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03026_003 『세종실록』 3년 3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5006_001 『예종실록』 1년 5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05006_001 『태종실록』 12년 5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706020_001 『태종실록』 17년 6월 20일]}}
 
 
 
조선시대 서울에 설치되어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한 사학(四學)의 하나.
 
 
 
=='''개설'''==
 
 
 
남학은 1411년(태종 11)에 개설된 사부학당의 하나로, 중등 교육을 위해 설치되었다. 남학에는 [[교수(敎授)]]와 [[훈도(訓導)]]가 배치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유생들 중 성적 우수자는 선발되어 성균관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전기부터 이 기관의 교육적 성과를 높이기 위한 정책들이 시행되었다고는 하나, 그 실효성은 의문시 되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초 한성부를 오부(五部)로 편제하면서 이에 맞추어 각 부(部)에 학당을 설치하려고 하였다. 처음으로 1411년(태종 11) 한성부 남부의 성명방(誠明坊)에 남학을 설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06029_002 『태종실록』 11년 6월 29일]). 이후 순차적으로 1422년(세종 4)에 [[중학(中學)]]을, 1424년(세종 6)에 서학(西學)을 설치하고, 1428년(세종 10) 이전까지 [[동학(東學)]]도 설치하였으나 북학(北學)은 끝내 설치하지 못해 결국 사부학당으로 남았다. 남학을 포함한 사부학당은 유생들의 중등 교육을 위한 기관이었다.
 
 
 
=='''조직 및 역할'''==
 
 
 
남학을 비롯해 사부학당에는 각 학당마다 종6품의 교수 2명, 정9품의 훈도 2명씩을 두었다. 이 관직은 성균관 관원이 겸하도록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11016_001 『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그러나 1466년(세조 12) 1월 관제 개편 과정에서 겸직제를 폐지하고 전임 관원을 두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201015_001 『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학당에서는 10살 이상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15세 이상인 유생들 중 학업이 어느 정도 성취된 사람은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11016_001 『태종실록』 11년 11월 16일]). 그러나 남학을 포함한 학당의 교육적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인데, 이미 1421년(세종 3)부터 학당의 아이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03026_003 『세종실록』 3년 3월 26일]).
 
 
 
이에 성과를 높이기 위해 1469년(예종 1) 5월에는 사부학당 유생 중 80인을 선발해서 이들을 남학에 모아 경서를 암송하는 [[고강(考講)]], 글을 짓고 쓰는 [[제술(製述)]]을 시험 보게 하는([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5006_001 『예종실록』 1년 5월 6일]) 등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여전히 교육적 성과는 미미했다.
 
 
 
한편 유생들에게 매 끼니 음식을 조달하기 위해 1412년(태종 12) 5월에는 학당에 토지 100결을 하사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05006_001 『태종실록』 12년 5월 6일]), 1417년(태종 17)부터는 정부의 모든 경비를 관할하는 풍저창(豊儲倉)에서 매월 일정량을 지급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706020_001 『태종실록』 17년 6월 20일]).
 
 
 
=='''변천'''==
 
 
 
남학 등 사부학당의 관원은 조선후기 정원이 조정되어 영조대 간행된 『속대전』에는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가 모두 1명씩 축소되어 올라갔다. 그리고 이 보다 이전인 1654년(효종 5)에는 김익희(金益熙)의 건의로, 국왕을 측근에서 모신 시종신(侍從臣)을 대상으로 겸교수(兼敎授)로 차출하도록 하였다. 이 겸교수 직제는 이후 숙종 초에 잠시 폐지되었다가 곧 다시 복구되어 『속대전』에 올랐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주 경국대전-주석편』, 1986.     
 
*이광린, 「선초의 사부학당」, 『역사학보』16, 역사학회, 1961.     
 
*피정만, 「조선시대 성균관·사학의 유생에 관한 연구」, 『한국교육사학』3, 한국교육사연구회, 1981.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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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교육·출판]][[분류:교육기관]][[분류:사부학당]][[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
 

2018년 1월 24일 (수) 22:12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