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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대표표제=이명규|한글표제=이명규|한자표제=李名珪|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중종~명종|집필자=최양규|자=광윤(光潤)|호=|봉작=|시호=안광(安匡)|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497년(연산군 3)|사망=1560년(명종 15) 1월 21일|본관=고성(固城)|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 동면(東面) 독우미리(禿于味里) 둔지산(鈍之山)|증조부=이지(李墀)|조부=이수(李陲)|부=이순(李峋)|모_외조=하동 정씨(河東鄭氏) : 정문언(鄭文彦)의 딸|형제=|처_장인=(첫째부인)한산 이씨(韓山李氏) (둘째부인)함양 여씨(咸陽呂氏) (셋째부인)전주 이씨(全州李氏)|자녀=(1자)이지(李砥)|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42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ka_12509025_003 『중종실록』 25년 9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610023_005 『중종실록』 26년 10월 23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3211014_002 『중종실록』 32년 11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la_10107001_005 『인종실록』 1년 7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1206005_002 『명종실록』 12년 6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1208019_002 『명종실록』 12년 8월 19일], [http://sillok.history.go.kr/id/kma_11501021_002 『명종실록』 15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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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1497년(연산군 3)∼1560년(명종 15) = 64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이고, 시호는 안광(安匡)이다. 자는 광윤(光潤)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이순(李峋)은 의영고(義盈庫) 영(令)이고, 어머니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정문언(鄭文彦)의 딸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으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원(李原)의 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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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7년(연산군 3)∼1560년(명종 15) = 64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이고, 시호는 안광(安匡)이다. 자는 광윤(光潤)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이순(李峋)은 의영고(義盈庫) 영(令)이고, 어머니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정문언(鄭文彦)의 딸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으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원(李原)의 현손이다.
  
 
=='''중종 시대 활동'''==
 
=='''중종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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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관(言官)이 되어서는 세세한 것을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고, 그중에서 중요한 것만 지키려고 힘썼는데, 그는 항상 말하기를, “명예를 좋아하고 자신이 곧다는 것을 과시하여 사단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면 나라에 무익하고 자신에게 해만 되니, 마땅히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승정원에 근무 할 때는 출퇴근을 부지런히 하였고 왕명 출납을 신중히 하였으며, 동료들과 농담을 하지 않았고 또 까다롭게 살피거나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좋아하였다. 그가 돌아가자, 명종은 “평온하고 화목한 재상이 죽었다.”며 애도 하였다. 사관(史官)은 그가 남을 시기하고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성품이 너무 유(柔)하여 관직에 있을 때나 가정에 있을 때나 굳세게 결단하는 힘이 부족했다고 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1501021_002 『명종실록』 15년 1월 21일])
 
언관(言官)이 되어서는 세세한 것을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고, 그중에서 중요한 것만 지키려고 힘썼는데, 그는 항상 말하기를, “명예를 좋아하고 자신이 곧다는 것을 과시하여 사단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면 나라에 무익하고 자신에게 해만 되니, 마땅히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승정원에 근무 할 때는 출퇴근을 부지런히 하였고 왕명 출납을 신중히 하였으며, 동료들과 농담을 하지 않았고 또 까다롭게 살피거나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좋아하였다. 그가 돌아가자, 명종은 “평온하고 화목한 재상이 죽었다.”며 애도 하였다. 사관(史官)은 그가 남을 시기하고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성품이 너무 유(柔)하여 관직에 있을 때나 가정에 있을 때나 굳세게 결단하는 힘이 부족했다고 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1501021_002 『명종실록』 15년 1월 21일])
  
그는 행촌(杏村)의 서법을 이어받아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를 모두 잘 썼다고 하는데, 행촌은 그의 조상으로 고려 말에 서법으로 일가를 이룬 문하시중(門下侍中)이암(李嵒)이다. 활쏘기에도 뛰어났던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남자는 육예(六藝) 가운데 한 가지라도 힘써 배워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의 활 쏘는 실력이 당시 무인들조차 따라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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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행촌(杏村)의 서법을 이어받아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를 모두 잘 썼다고 하는데, 행촌은 그의 조상으로 고려 말에 서법으로 일가를 이룬 문하시중(門下侍中)이암(李嵒)이다. 활쏘기에도 뛰어났던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남자는 육예(六藝) 가운데 한 가지라도 힘써 배워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의 활 쏘는 실력이 당시 무인들조차 따라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와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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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는 안광이다. 묘소는 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 동면(東面) 독우미리(禿于味里)둔지산(鈍之山)에 있고, 홍섬(洪暹)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시호는 안광이다. 묘소는 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 동면(東面) 독우미리(禿于味里)둔지산(鈍之山)에 있고, 홍섬(洪暹)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덕부(李德敷)의 딸이고, 둘째 부인 함양  여씨(咸陽呂氏)는 찰방(察訪)여공단(呂公端)의 딸이며, 셋째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주부(主簿)이삼(李參)의 딸인데, 세 명의 부인 모두 자녀가 없었다. 그런데 이명규가 함경도관찰사였을 때, 총애하던 여자로부터 아들 이희원(李熙元)을 얻었다. 그러나 이희원이 노비의 신분이었으므로, 이를 민망하게 여긴 그는 명종에게 노비의 신분을 양인(良人)으로 바꾸어 줄 것을 청하였다. 아들이 없던 그를 가련하게 여긴 명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夫人)이 그의 사촌동생 이택(李澤)의 아들 이지(李砥)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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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덕부(李德敷)의 딸이고, 둘째 부인 함양  여씨(咸陽呂氏)는 찰방(察訪)여공단(呂公端)의 딸이며, 셋째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주부(主簿)이삼(李參)의 딸인데, 세 명의 부인 모두 자녀가 없었다. 그런데 이명규가 함경도관찰사였을 때, 총애하던 여자로부터 아들 이희원(李熙元)을 얻었다. 그러나 이희원이 노비의 신분이었으므로, 이를 민망하게 여긴 그는 명종에게 노비의 신분을 양인(良人)으로 바꾸어 줄 것을 청하였다. 아들이 없던 그를 가련하게 여긴 명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夫人)이 그의 사촌동생 이택(李澤)의 아들 이지(李砥)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2018년 1월 9일 (화) 22:52 기준 최신판




총론

[1497년(연산군 3)∼1560년(명종 15) = 64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이고, 시호는 안광(安匡)이다. 자는 광윤(光潤)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이순(李峋)은 의영고(義盈庫) 영(令)이고, 어머니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정문언(鄭文彦)의 딸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으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이원(李原)의 현손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9년(중종 14)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의 양과에 모두 합격하고, 1528년(중종 23) 식년(式年)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 과거 급제 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1529년(중종 24)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이 되었고, 1530년(중종 25)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25년 9월 25일)

그러나 1531년(중종 26)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가 다시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의 정계 복귀를 반대하던 이명규는 탄핵을 받고 서반(西班)의 사과(司果)로 밀려나게 되었다.(『중종실록』 26년 10월 23일) 1532년(중종 27)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고, 동지사(冬至使)의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33년(중종 28)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에 임명되었는데, 1534년(중종 29)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상례(喪禮)를 마친 후, 1536년(중종 31) 예빈시(禮賓寺) 판관(判官)이 되었고, 호조 정랑(正郞)·예조 정랑·형조 정랑·공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제거되면서,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중앙 정계로 복귀하였다.(『중종실록』 32년 11월 14일) 1538년(중종 33)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었고, 1539년(중종 34)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으로 전직되었다.

1540년(중종 35)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정3품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면서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전임 되었다. 1541년(중종 36) 승정원 좌부승지(左部承旨)를 거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1542년(중종 37)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고,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3년(중종 38)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인종~ 명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 1) 인종(仁宗) 즉위 후, 다시 승정원 도승지에 발탁되었으나, 이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로 전임되었다.(『인종실록』 1년 7월 1일)

1547년(명종 2)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고,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임명되어 외방으로 나갔다. 1549년(명종 4) 돈녕부(敦寧府) 지사(知事)가 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1550년(명종 5)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1551년(명종 6) 다시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52년(명종 7) 형조 판서(判書)를 거쳐서, 1553년(명종 8) 예조 판서와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554년(명종 9)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파견되었다. 1557년(명종 12) 동지사(冬至使) 겸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대비(大妃)의 고명(誥命)을 받아 돌아왔다.(『명종실록』 12년 6월 5일),(『명종실록』 12년 8월 19일) 그 공로로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1558년(명종 13) 돈녕부(敦寧府) 판사(判事)겸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560년(명종 15)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성품과 일화

키는 보통 정도였으나, 타고난 기와 도량이 컸다. 성품은 소탈하며 온화하고 후덕하여, 사람들과 사귈 때 거리를 두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완전해지도록 힘썼다. 향리의 사람들과는 가까운 사람처럼 화목하게 지냈다. 집안에서는 그리 엄하게도 하지 않고 설만(褻慢)하게 하지도 않았으므로, 미천한 노복까지도 저절로 규범을 지키게 되었다.

언관(言官)이 되어서는 세세한 것을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고, 그중에서 중요한 것만 지키려고 힘썼는데, 그는 항상 말하기를, “명예를 좋아하고 자신이 곧다는 것을 과시하여 사단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면 나라에 무익하고 자신에게 해만 되니, 마땅히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승정원에 근무 할 때는 출퇴근을 부지런히 하였고 왕명 출납을 신중히 하였으며, 동료들과 농담을 하지 않았고 또 까다롭게 살피거나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좋아하였다. 그가 돌아가자, 명종은 “평온하고 화목한 재상이 죽었다.”며 애도 하였다. 사관(史官)은 그가 남을 시기하고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성품이 너무 유(柔)하여 관직에 있을 때나 가정에 있을 때나 굳세게 결단하는 힘이 부족했다고 평했다.(『명종실록』 15년 1월 21일)

그는 행촌(杏村)의 서법을 이어받아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를 모두 잘 썼다고 하는데, 행촌은 그의 조상으로 고려 말에 서법으로 일가를 이룬 문하시중(門下侍中)이암(李嵒)이다. 활쏘기에도 뛰어났던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남자는 육예(六藝) 가운데 한 가지라도 힘써 배워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의 활 쏘는 실력이 당시 무인들조차 따라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안광이다. 묘소는 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 동면(東面) 독우미리(禿于味里)둔지산(鈍之山)에 있고, 홍섬(洪暹)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덕부(李德敷)의 딸이고, 둘째 부인 함양 여씨(咸陽呂氏)는 찰방(察訪)여공단(呂公端)의 딸이며, 셋째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주부(主簿)이삼(李參)의 딸인데, 세 명의 부인 모두 자녀가 없었다. 그런데 이명규가 함경도관찰사였을 때, 총애하던 여자로부터 아들 이희원(李熙元)을 얻었다. 그러나 이희원이 노비의 신분이었으므로, 이를 민망하게 여긴 그는 명종에게 노비의 신분을 양인(良人)으로 바꾸어 줄 것을 청하였다. 아들이 없던 그를 가련하게 여긴 명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부인(夫人)이 그의 사촌동생 이택(李澤)의 아들 이지(李砥)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용헌집(容軒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상촌집(象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역대요람(歷代要覽)』
  • 『호음잡고(湖陰雜稿)』
  • 『퇴계집(退溪集)』
  • 『간재집(艮齋集)』
  • 『인재집(忍齋集)』
  • 『송강집(松江集)』
  • 『겸암집(謙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