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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순옹주(惠順翁主)는 1512년(중종 7) 1월 25일 중종과 박경빈의 사이에서 1남 2녀 중의 장녀로 태어났다. 1521년(중종 16) 10세 되던 해에 세 살 아래인 호조 [[참의(參議)]]김헌윤(金憲允)의 아들 김인경(金仁慶)과 혼인하였는데, 부마 김인경은 광천위에 봉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612028_003 『중종실록』 16년 12월 28일])
 
혜순옹주(惠順翁主)는 1512년(중종 7) 1월 25일 중종과 박경빈의 사이에서 1남 2녀 중의 장녀로 태어났다. 1521년(중종 16) 10세 되던 해에 세 살 아래인 호조 [[참의(參議)]]김헌윤(金憲允)의 아들 김인경(金仁慶)과 혼인하였는데, 부마 김인경은 광천위에 봉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612028_003 『중종실록』 16년 12월 28일])
  
1527년(중종 22)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숙청당하였던 사림파(士林派)의 김안로(金安老)가 사화의 주동자 심정(沈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자 중종의 맏사위인 김희(金禧)와 함께 작서의 변을 일으켰다. 당시 이 사건은 혜순옹주의 어머니 박경빈이 아들 복성군을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세자(훗날의 인종(仁宗))를 저주하여 벌인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그러면서 혜순옹주의 계집종들까지 추국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204014_003 『중종실록』 22년 4월 14일]),([http://sillok.history.go.kr/id/kka_12204015_006 『중종실록』 22년 4월 15일]) 그리고 박경빈을 처벌해야 한다는 조정의 여론에 따라 중종은 박경빈을 폐서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204021_001 『중종실록』 22년 4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ka_12204021_003 『중종실록』 22년 4월 21일]) 그런데 그로부터 6년 후에 세자를 모함했다는 <가작인두의 변>이 발생하면서, 박경빈과 혜순옹주의 친오라버니 복성군에게 사약이 내려졌고, 혜순옹주 역시 폐서인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805023_009 『중종실록』 28년 5월 23일]) 부마 김인경 또한 먼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얼마 후 혜순옹주는 남편을 따라 경상도 상주로 유배를 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805026_005 『중종실록』 28년 5월 26일]),([http://sillok.history.go.kr/id/kka_12807020_006 『중종실록』 2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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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년(중종 22)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숙청당하였던 사림파(士林派)의 김안로(金安老)가 사화의 주동자 심정(沈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자 중종의 맏사위인 김희(金禧)와 함께 작서의 변을 일으켰다. 당시 이 사건은 혜순옹주의 어머니 박경빈이 아들 복성군을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세자(훗날의 인종(仁宗))를 저주하여 벌인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그러면서 혜순옹주의 계집종들까지 추국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204014_003 『중종실록』 22년 4월 14일]),([http://sillok.history.go.kr/id/kka_12204015_006 『중종실록』 22년 4월 15일]) 그리고 박경빈을 처벌해야 한다는 조정의 여론에 따라 중종은 박경빈을 폐서인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204021_001 『중종실록』 22년 4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ka_12204021_003 『중종실록』 22년 4월 21일]) 그런데 그로부터 6년 후에 세자를 모함했다는 <가작인두의 변>이 발생하면서, 박경빈과 혜순옹주의 친오라버니 복성군에게 사약이 내려졌고, 혜순옹주 역시 폐서인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805023_009 『중종실록』 28년 5월 23일]) 부마 김인경 또한 먼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얼마 후 혜순옹주는 남편을 따라 경상도 상주로 유배를 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2805026_005 『중종실록』 28년 5월 26일]),([http://sillok.history.go.kr/id/kka_12807020_006 『중종실록』 28년 7월 20일])
  
 
그러는 가운데 1541년(중종 36) 세자가 복성군의 딸 및 이복누이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용서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복성군의 딸이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없이 되었고, 두 옹주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는데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냐며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결국 중종은 속적을 회복시켜 직첩을 돌려주고, 혜순옹주의 부마 김인경도 직첩을 주어 서용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3611009_003 『중종실록』 36년 11월 9일])
 
그러는 가운데 1541년(중종 36) 세자가 복성군의 딸 및 이복누이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용서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복성군의 딸이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없이 되었고, 두 옹주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는데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냐며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결국 중종은 속적을 회복시켜 직첩을 돌려주고, 혜순옹주의 부마 김인경도 직첩을 주어 서용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3611009_003 『중종실록』 36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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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순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산303번지에 있다.
 
혜순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산303번지에 있다.
  
혜순옹주는 부마 김인경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시동생인 김원경(金遠慶)의 아들 김호수(金虎秀)를 계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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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순옹주는 부마 김인경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시동생인 김원경(金遠慶)의 아들 김호수(金虎秀)를 계후로 삼았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2018년 1월 9일 (화) 22:52 기준 최신판




총론

[1512년(중종 7)~1583년(선조16) = 72세]. 조선의 제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박경빈(朴競嬪)은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주도한 정국공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박원종(朴元宗)의 수양딸로, 친아버지는 경상도 상주 지방의 사족 출신 박수림(朴秀林)이다. 친오라버니는 복성군(福城君)이며, 친동생은 혜정옹주(惠靜翁主)이다. 부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광천위(光川尉)김인경(金仁慶)이다. <작서(灼鼠)의 변>으로 서인으로 폐출되어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었다가, 복작(復爵)되었다.

출생과 혼인생활

혜순옹주(惠順翁主)는 1512년(중종 7) 1월 25일 중종과 박경빈의 사이에서 1남 2녀 중의 장녀로 태어났다. 1521년(중종 16) 10세 되던 해에 세 살 아래인 호조 참의(參議)김헌윤(金憲允)의 아들 김인경(金仁慶)과 혼인하였는데, 부마 김인경은 광천위에 봉해졌다.(『중종실록』 16년 12월 28일)

1527년(중종 22)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숙청당하였던 사림파(士林派)의 김안로(金安老)가 사화의 주동자 심정(沈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자 중종의 맏사위인 김희(金禧)와 함께 작서의 변을 일으켰다. 당시 이 사건은 혜순옹주의 어머니 박경빈이 아들 복성군을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세자(훗날의 인종(仁宗))를 저주하여 벌인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그러면서 혜순옹주의 계집종들까지 추국을 받았다.(『중종실록』 22년 4월 14일),(『중종실록』 22년 4월 15일) 그리고 박경빈을 처벌해야 한다는 조정의 여론에 따라 중종은 박경빈을 폐서인하였다.(『중종실록』 22년 4월 21일),(『중종실록』 22년 4월 21일) 그런데 그로부터 6년 후에 세자를 모함했다는 <가작인두의 변>이 발생하면서, 박경빈과 혜순옹주의 친오라버니 복성군에게 사약이 내려졌고, 혜순옹주 역시 폐서인이 되었다.(『중종실록』 28년 5월 23일) 부마 김인경 또한 먼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얼마 후 혜순옹주는 남편을 따라 경상도 상주로 유배를 갔다.(『중종실록』 28년 5월 26일),(『중종실록』 28년 7월 20일)

그러는 가운데 1541년(중종 36) 세자가 복성군의 딸 및 이복누이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를 용서해 줄 것을 상소하였다. 복성군의 딸이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없이 되었고, 두 옹주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는데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냐며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결국 중종은 속적을 회복시켜 직첩을 돌려주고, 혜순옹주의 부마 김인경도 직첩을 주어 서용하게 하였다.(『중종실록』 36년 11월 9일)

부마 김인경이 세상을 떠나고 거의 반달 후인 1583년(선조 16) 12월 4일 혜순옹주 또한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혜순옹주와 김인경은 같은 날에 양근군(楊根郡) 북평리(北平里) 술좌(戌坐) 진향(辰向)에서 장사지냈다.

묘소 및 후손

혜순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산303번지에 있다.

혜순옹주는 부마 김인경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시동생인 김원경(金遠慶)의 아들 김호수(金虎秀)를 계후로 삼았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동각잡기(東閣雜記)』
  • 『용재집(容齋集)』
  • 지두환, 『중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