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란록(勘亂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XML 가져오기)
 
1번째 줄: 1번째 줄:
  
  
{{문헌|대표표제=감란록|한글표제=감란록|한자표제=勘亂錄|대역어=|상위어=무신란(戊申亂)|하위어=|동의어=무신감란록(戊申勘亂錄)|관련어=이인좌(李麟佐), 국안(鞫案), 남정록(南征錄), 남정일록(南征日錄), 서정록(西征錄)|분야=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유형=문헌|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후기|왕대=|집필자=이근호|저편자=송인명(宋寅明) 등 봉교찬(奉敎撰)|간행처=|간행년일=1729년(영조 5) 11월|권책수=6권/4책|사용활자=금속활자본(현종실록자)|표제=감란록(勘亂錄)|소장처=계명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국국학진흥원 도서관 등|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504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5005_003 『영조실록』 4년 5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7022_002 『영조실록』 4년 7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07116_002 『영조실록』 5년 윤7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09027_003 『영조실록』 5년 9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10005_002 『영조실록』 5년 10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10005_005 『영조실록』 5년 10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11012_001 『영조실록』 5년 11월 12일]}}
+
{{서명사전|대표표제=감란록|한글표제=감란록|한자표제=勘亂錄|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역사서|유형=한문|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영조|집필자=성낙수|저편자=송인명, 박사수|간행처=미상|간행년일=1729|권책수=6권 4책|사용활자=고활자본|표제=감란록(勘亂錄)|소장처=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70000257|실록연계=}}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사건의 전말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간행된 책.
+
이 책은 1728년(영조 4)에 일어났던 이인좌·정희량의 난에 대한 전모를 정리하여 편집한 책이다.
  
 
=='''개설'''==
 
=='''개설'''==
  
『감란록(勘亂錄)』은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부르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한 후 반란의 전말을 알려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간행된 책이다. 6권 4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감란록』은 일자별로 이인좌의 난 당시 반란군 측의 동향, 이에 대한 조정의 논란과 그 대책 등을 매우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체포된 반란군의 [[추국(推鞫)]] 과정과 그 추국 내용 역시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어 관련 분야의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이인좌의 난과 관련해서는 『감란록』 이외에 『남정록(南征錄)』, 혹은 다른 명칭으로 『남정일록(南征日錄)』도 참고가 된다.
+
무신란은 김일경(金一鏡)을 비롯한 소론 일부 과격파들이 저지른 역란이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붕당 간의 갈등과 당론이 최초의 근원으로서 해석되며, 소론과 서덕수를 비롯한 노론의 공동 책임이 강조되었다. 조현명(趙顯命)이 쓴 어제 서문에는 이 사건이 붕당 때문에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이와 같은 변란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각 죄인의 공초 및 이인좌의 공초가 초록되어 있다. 또한 이인좌난의 공신인 오항명의 개선광경, 공신들의 명단, 감훈별단이 들어 있다. 같은 사건을 다룬 자료 중에서는 가장 체계적인 경과 보고서로서, 정부 측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편찬/발간 경위'''==
  
『감란록』은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직후인 1728년 5월, 간행 문제가 제기되었다. 조태억(趙泰億)·이광좌(李光佐) 등은 이괄(李适)의 난 때 기록인 『서정록(西征錄)』과 같이 죄인들의 심문 기록인 [[국안(鞫案)]]을 토대로 송인명(宋寅明)의 주관하에 간행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름은 『무신감란록(戊申勘亂錄)』으로 하자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5005_003 『영조실록』 4년 5월 5일]). 이후 송인명과 함께 [[박사수(朴師洙)]]주관자로 결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7022_002 『영조실록』 4년 7월 22일]).
+
이 책은 영조의 명에 의해, 1728년(영조 4)에 있었던 ‘이인좌·정희량의 난’에 대한 전후시말을 각종 자료에서 뽑아 편집하였다. 난이 평정된 1729년(영조 5) 정석삼·이광좌·조문명 등의 진언에 따라, 영조는 좌의정조태억에게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송인명(宋寅明)·박사수(朴師洙)가 편집하여, 같은 해에 간행하였다.
  
송인명 등에 의해 편찬이 진행되던 중 유봉휘(柳鳳輝)의 상소를 김일경(金一鏡)이 찬술한 교문(敎文)보다 먼저 수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수록 내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07116_002 『영조실록』 5년 윤7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09027_003 『영조실록』 5년 9월 27일]). 편집 작업이 어느 정도 마감된 10월에는 조현명(趙顯命)에게 서문을 지어 바치도록 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10005_002 『영조실록』 5년 10월 5일]), 왕의 일부 수정을 거쳐([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10005_005 『영조실록』 5년 10월 5일]) 11월경에 간행되었다. 간행된 책은 공신들과 책의 편집을 주관한 당상들에게 배부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11012_001 『영조실록』 5년 11월 12일]).
+
이 책에는 조현명(趙顯命)이 쓴 영조의 어제서문(御製序文)이 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이인좌의 난은 신임사화(辛壬士禍)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사화는 1721년(경종 1)~1722년(경종 2)에 소론의 목호룡(睦虎龍) 형제가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아,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한다고 고발하여 일어난 큰 옥사였다. 이 때 노론인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사대신 및 100여 명이 사사 혹은 귀양 가게 되었는데,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시화는 무고임이 밝혀져 목희룡·김일경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인좌는 김일경의 잔당으로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여 1728년 난을 일으켰는데, 주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이 사건은 다음 해에 도순무사인인 오명항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영조는 이 난 후 이와 같은 변란의 재발을 막기 위한 작업으로 이 책을 편찬하였음을 서문에서 명시하고 있다. 영조는 이 사건의 원인을 붕당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붕당의 유래를 서술한 다음, 신임사화의 고발자인 목호룡의 무고는 곧 김일경·박필몽이 만들어 낸 것이며, 교문(敎文)을 지어 횡포를 부리고 군부(君父)를 속이고 반역한 것도 그들 때문이라 하고, 그 근원을 붕당에 돌리고 있으며, 붕당의 폐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서지 사항'''==
 
=='''서지 사항'''==
  
『감란록』은 목판본이며 6권 4책으로, 『현종실록』을 인쇄하기 위하여 만든 동활자(銅活字)인 현종실록자(顯宗實錄字)로 간행되었다. 『감란록』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고려대학교 도서관, 계명대학교 도서관, 한국국학진흥원 도서관 등 다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
6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활자본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은 22.6×15.1cm이며, 10행 18자의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상하내향2엽화문어미(上下內向2葉花紋魚尾)를 갖추고 있다.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구성/내용'''==
  
『감란록』의 서문인 「서감란록잉계대소신료(序勘亂錄仍戒大小臣僚)」는 어제(御製), 조현명이 명을 받아 작성하였다. 본문은 6권으로 구성되었다.
+
이 책은 난의 진행과정을 서술하면서, 그 진행과정 사이에 여러 관련 죄인의 공초가 초록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을 통하여 외면적으로만 파악하였던 난의 원인과 내용 및 당대에서의 파급범위를 구명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난이 일어나기 전 해인 1727년(영조 3)의 기록을 보면, 이것이 그 이전의 변산반도의 ‘도적’들이나 민란들과 무관하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이 난이 단순한 정치싸움이라기보다는 민란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권1은 1728년(영조 4) 3월 14일 최규서(崔奎瑞)의 고변 내용을 시작으로 같은 해 3월 24일 남한순무사(南漢巡撫使)김동필(金東弼)이 반란군 측 장수인 정조윤(鄭祚胤)·곽중휘(郭重輝)를 붙잡아 보낸다는 장계까지를 서술하였다.
+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난의 규모가 삼남지방(충청도 충주, 경기 남쪽 죽산·안성 및 경상도의 거창·안음 등)의 일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함경도·평안도 등지에서까지 이에 동의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만큼 전국적인 규모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인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이 난을 소론측이 일으킨 난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농민봉기군층(‘도적’으로 지칭됨)이 이들에 의해 모집되어, 수적으로는 광범위하게 참가하고 있으나, 그 공로는 당색이 있는 자들에게 모두 돌아가고, 농민봉기군 측에 대한 자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2는 같은 해 3월 25일 도순무종사관(都巡撫從事官)조현명을 발탁하여 승지로 임명한 사실과 왕이 창덕궁 돈화문의 문루에 나아가 헌부례(獻俘禮)를 행하고 선전관이 반란군 측 박종원(朴宗元) 등의 수급(首級)을 바친 사실로부터 같은 해 4월 6일 호서안무사(湖西按撫使)김재로(金在魯)가 한종백(韓宗白)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던 한세홍(韓世弘)을 관아에 잡아 가두었다는 장계까지를 서술하였다.
+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각인의 공초를 세밀히 살핌으로써, 전모가 밝혀질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다른 공초 자료에서 누락된 이인좌의 공초가 초록되어 있어, 난의 성격 및 규모를 밝히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 외에 사도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병조판서오명항의 개선광경과 헌괵례(獻馘禮)의 광경도 제시되어 있고, 난의 토평(討平)에 공이 있는 공신들의 명단과 감훈별단(勘勳別單) 등이 제시되어 있어, 같은 사건을 다룬 자료들 중에서 가장 체계가 있는 난의 경과보고서로 보인다.
  
권3은 같은 해 4월 7일 반란군 측 [[박필현(朴弼顯)]] 부자의 수급이 상주(尙州)에서 도착하자 의금부와 한성부의 당상이 일제히 모여 박필현의 서제(庶弟) 박필충(朴弼忠) 등과 박필현이 거느리고 있던 하인 김두량(金斗良) 등을 효시하였다는 사실부터 같은 해 4월 14일 강원도관찰사이형좌(李衡佐)가 반란군 측 한세홍의 동생 한세능(韓世能)을 잡아 보낸다는 장계까지를 수록하였다.
+
=='''의의와 평가'''==
  
권4는 같은 해 4월 15일 난역(亂逆)평정되었으니 각처의 나루터나 요로(要路)에서 파수(把守)하는 것을 그만두고 군사들을 돌려보내 농상(農桑)에 전념하게 하라는 왕의 하교를 시작으로 같은 해 4월 29일 반란군 측 이사로(李師魯)와 만적(萬積)의 [[국문(鞫問)]] 내용까지를 수록하였다. 이 과정에는 반란의 평정에 공이 있는 오명항(吳命恒)이나 박찬신(朴纘臣) 등의 공신 책봉 내용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
책의 봉기군 측의 사료는 역적의 후손들이 연좌율(連坐律)에 걸려, 그들의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이 이인좌의 난을 규명하는 데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난을 분수령으로 하여 노론이 완전 득세하였기 때문에 책은 정치사적인 면에서도 특히 의미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권5는 같은 해 4월 29일 왕이 이인좌 체포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한 신길만(申吉萬)에게 상현궁(上弦弓)을 하사하고 오명항 등에게 녹훈(錄勳)을 내린 사실 등을 시작으로 같은 해 5월 10일 경상좌병사민창기(閔昌基)의 석방 사실 및 호서안문사김재로가 민백효(閔百孝)의 종인 순봉(順奉)과 만재(萬才) 등을 공초(供招)한 내용을 장계로 보고한 사실까지를 기록하였다.
 
 
 
권6은 같은 해 5월 12일 성득하(成得夏)와 이한초(李漢楚)의 2차 형문(刑問)과 이의전(李義全) 등의 추문(推問) 내용 등을 시작으로 같은 해 7월 17일 왕이 공신들의 회맹제(會盟祭)를 위해 경복궁 신무문 밖으로 거둥한 사실과 7월 18일 회맹제를 지낸 사실 등을 수록하였다. 회맹제의 축문은 지제교윤혜교(尹惠敎)가 지어 바쳤다. 밖에도 7월 19일 공신에게 교서 및 수서(手書)를 내린 사실과 다음 날 공신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한 사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koreanhistory.or.kr/.       
+
*진유라, 「조선후기 호남지역 중기(重記)에 수록된 기록물 분석」, 경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
*허태용, 「<경종실록(景宗實錄)>을 통해서 본 소론(少論)의 정치 의리(義理) 검토」, 『민족문화연구』 제60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3.    
=='''관계망'''==
+
*허태용, 「英祖代 蕩平政局下 國家義理書 편찬과 戊申亂 해석 - 『勘亂錄』, 『御製大訓』, 『闡義昭鑑』의 비교 검토」, 『사학연구』 제116호, 한국사학회, 2014.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5043"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
*허태용, 「1728년 戊申亂의 진압과 『勘亂錄』의 편찬」, 『한국사연구』 제166호, 한국사연구회, 2014.    
  
[[분류:정치]][[분류:정치운영]][[분류:정쟁·정론]][[분류:문헌]][[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후기]]
+
[[분류:역사서]][[분류:한문]][[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영조]]

2018년 1월 8일 (월) 15:51 기준 최신판



이 책은 1728년(영조 4)에 일어났던 이인좌·정희량의 난에 대한 전모를 정리하여 편집한 책이다.

개설

무신란은 김일경(金一鏡)을 비롯한 소론 일부 과격파들이 저지른 역란이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붕당 간의 갈등과 당론이 최초의 근원으로서 해석되며, 소론과 서덕수를 비롯한 노론의 공동 책임이 강조되었다. 조현명(趙顯命)이 쓴 어제 서문에는 이 사건이 붕당 때문에 일어났음을 지적하고 이와 같은 변란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각 죄인의 공초 및 이인좌의 공초가 초록되어 있다. 또한 이인좌난의 공신인 오항명의 개선광경, 공신들의 명단, 감훈별단이 들어 있다. 같은 사건을 다룬 자료 중에서는 가장 체계적인 경과 보고서로서, 정부 측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영조의 명에 의해, 1728년(영조 4)에 있었던 ‘이인좌·정희량의 난’에 대한 전후시말을 각종 자료에서 뽑아 편집하였다. 난이 평정된 1729년(영조 5) 정석삼·이광좌·조문명 등의 진언에 따라, 영조는 좌의정조태억에게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송인명(宋寅明)·박사수(朴師洙)가 편집하여, 같은 해에 간행하였다.

이 책에는 조현명(趙顯命)이 쓴 영조의 어제서문(御製序文)이 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이인좌의 난은 신임사화(辛壬士禍)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이 사화는 1721년(경종 1)~1722년(경종 2)에 소론의 목호룡(睦虎龍) 형제가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아,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한다고 고발하여 일어난 큰 옥사였다. 이 때 노론인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사대신 및 100여 명이 사사 혹은 귀양 가게 되었는데,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시화는 무고임이 밝혀져 목희룡·김일경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인좌는 김일경의 잔당으로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여 1728년 난을 일으켰는데, 주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이 사건은 다음 해에 도순무사인인 오명항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영조는 이 난 후 이와 같은 변란의 재발을 막기 위한 작업으로 이 책을 편찬하였음을 서문에서 명시하고 있다. 영조는 이 사건의 원인을 붕당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붕당의 유래를 서술한 다음, 신임사화의 고발자인 목호룡의 무고는 곧 김일경·박필몽이 만들어 낸 것이며, 교문(敎文)을 지어 횡포를 부리고 군부(君父)를 속이고 반역한 것도 그들 때문이라 하고, 그 근원을 붕당에 돌리고 있으며, 붕당의 폐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서지 사항

6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활자본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은 22.6×15.1cm이며, 10행 18자의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상하내향2엽화문어미(上下內向2葉花紋魚尾)를 갖추고 있다.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난의 진행과정을 서술하면서, 그 진행과정 사이에 여러 관련 죄인의 공초가 초록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을 통하여 외면적으로만 파악하였던 난의 원인과 내용 및 당대에서의 파급범위를 구명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난이 일어나기 전 해인 1727년(영조 3)의 기록을 보면, 이것이 그 이전의 변산반도의 ‘도적’들이나 민란들과 무관하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이 난이 단순한 정치싸움이라기보다는 민란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난의 규모가 삼남지방(충청도 충주, 경기 남쪽 죽산·안성 및 경상도의 거창·안음 등)의 일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함경도·평안도 등지에서까지 이에 동의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만큼 전국적인 규모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인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이 난을 소론측이 일으킨 난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농민봉기군층(‘도적’으로 지칭됨)이 이들에 의해 모집되어, 수적으로는 광범위하게 참가하고 있으나, 그 공로는 당색이 있는 자들에게 모두 돌아가고, 농민봉기군 측에 대한 자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각인의 공초를 세밀히 살핌으로써, 전모가 밝혀질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다른 공초 자료에서 누락된 이인좌의 공초가 초록되어 있어, 난의 성격 및 규모를 밝히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 외에 사도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병조판서오명항의 개선광경과 헌괵례(獻馘禮)의 광경도 제시되어 있고, 난의 토평(討平)에 공이 있는 공신들의 명단과 감훈별단(勘勳別單) 등이 제시되어 있어, 같은 사건을 다룬 자료들 중에서 가장 체계가 있는 난의 경과보고서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의 봉기군 측의 사료는 역적의 후손들이 연좌율(連坐律)에 걸려, 그들의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이 이인좌의 난을 규명하는 데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 난을 분수령으로 하여 노론이 완전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 책은 정치사적인 면에서도 특히 의미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참고문헌

  • 진유라, 「조선후기 호남지역 중기(重記)에 수록된 기록물 분석」, 경북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 허태용, 「<경종실록(景宗實錄)>을 통해서 본 소론(少論)의 정치 의리(義理) 검토」, 『민족문화연구』 제60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3.
  • 허태용, 「英祖代 蕩平政局下 國家義理書 편찬과 戊申亂 해석 - 『勘亂錄』, 『御製大訓』, 『闡義昭鑑』의 비교 검토」, 『사학연구』 제116호, 한국사학회, 2014.
  • 허태용, 「1728년 戊申亂의 진압과 『勘亂錄』의 편찬」, 『한국사연구』 제166호, 한국사연구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