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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대표표제=해국도지|한글표제=해국도지|한자표제=海國圖誌|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관방(關防), 총지(總志)|분야=정치/군사·국방/병법·훈련법|유형=문헌|지역=중국|시대=조선후기|왕대=조선후기|집필자=이규철|저편자=|간행처=|간행년일=|권책수=|사용활자=|표제=|소장처=|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729|실록연계=}}
  
중국 청나라 말기의 학자 위원(魏源)이 지은 세계지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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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역사지리학자 위원(魏源)이 1844년 여러 국가의 정치·경제·인구·종교·지리 등을 설명해 놓은 지리서.
  
 
=='''개설'''==
 
=='''개설'''==
  
『해국도지(海國圖誌)』는 중국 청나라 말기의 학자 위원(魏源)이 지은 세계지리책이다. 이 책의 저자 위원은 청말의 공양학파(公羊學派)의 대표자의 하나로서, 청대 중기에 성행했던 고증학이 고전을 해석하고, 고증에 편중하여 실제성을 상실한 점을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사회ㆍ정치에 활용 가능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學)을 주장하면서, 이 입장에서 『시경』ㆍ『서경』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스스로도 정치의 실천에 참가하며, 아편전쟁(1839~1842)에서는 임칙서(林則徐) 등과 함께 영국군과 싸웠지만, 태평천국(1851~1864)의 운동에는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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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역사지리학자 위원(魏源)이 1844년 저술한 책으로, 여러 국가의 정치·경제·인구·종교·지리 등을 설명해 놓은 지리서이다. 중국 근대기에 저술된 지리서로는 최초로, 만국총지(萬國總志) 겸 다양한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한 세계사지(世界史志)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아편전쟁 후, 자국의 방위(防衛)와 세계의 대세에 대해 기술한 책으로 유명하다. 1822년에 써서 1844년에 간행했으며, 1847년에 다시 60권, 1852년에 100권으로 증보 간행했다. 지도(地圖)와 지지(地誌)로 나누어, 세계 각국의 지리ㆍ역사를 소개하고, 양이(洋夷)를 막기 위해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해외지식의 섭취에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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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국도지』에는 세계 주요 국가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 기후‚ 물산‚ 교통‚ 무역‚ 민정(民情)‚ 풍속‚ 문화‚ 교육‚ 국제 관계‚ 종교‚ 역법(曆法)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아울러 저자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전함과 [[화륜선(火輪船)]]‚ 지뢰‚ 수뢰‚ 망원경 등 전술무기와 병기의 제조 방식과 생산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서지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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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발간 경위'''==
  
100권 2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4.3cm 가로14.9cm이며,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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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은 전통 사대부의 지식과 관습적 경험을 결합하여 청나라 정부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금문학파(今文學派)의 지도자였다. 그는 1822년(청 도광 2) 과거에 급제하여 내각(內閣) 중서(中書)가 되었다. 이후 1826년(청 도광 6) 정치·경제 문제 등에 대한 연구서의 성격을 갖는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의 편찬을 주도했다. 이후 위원은 계속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중시하는 성향을 보였다.
  
=='''구성/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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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은 아편전쟁 당시 양절총독(兩浙總督)유겸(裕謙)의 막부(幕府)에서 군기(軍機)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학문에 대한 연구와 전쟁의 경험 등을 통해 서양의 군사력과 과학의 뛰어남을 절감했던 위원은 이후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그들의 뛰어난 능력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중엽 아편전쟁의 패배로 조공체제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상황 아래서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서양의 무기나 우수한 제도를 수용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위원은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그가 발간한 『해국도지』의 판본별 특징과 유통은 세계관의 변화 및 지식의 유통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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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은 이 같은 생각을 갖고 『해국도지』를 저술했다. 특히 『해국도지』는 서양의 자료를 직접 번역하고 이용하여 저술했던 최초의 저술이었다. 비록 당시 중국에서 가지고 있던 서양과 서양인에 대한 선입견이 잘못 반영되어 있는 내용도 많았지만 근대 역사에서 『해국도지』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1842년(도광(道光) 22)에 위원은 린저쉬(林則徐)의 부탁으로 그가 번역한 『사주지(四洲志)』를 저본으로 『해국도지』를 50권본으로 출간하였다. 위원은 『해국도지』 발간을 통해, 1차 아편전쟁 이후 민중의 의식을 깨우쳐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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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사항'''==
  
영국과 ‘남경조약(南京條約)’ 체결 이후 다른 서양 국가와 여러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자, 위원은 서양에 대한 지식과 함께 선진적인 무기 제작방법을 알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1847년에 『해국도지』를 증보하여, 60권본으로 재출간하였다. 또 위원은 선교사를 통해, 직접 외국 서적을 입수하고, 동시대 쉬찌위(徐繼畬)가 저술한 『영환지략(瀛環志略)』 내용을 참조하여 100권본 『해국도지』를 저술하였다. 100권본 『해국도지』는 기존의 50권본과 60권본보다 세계 각국의 인문지리에 대한 내용을 확충하는 등 당시 중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필요한 외부지식을 모두 총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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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모두 100권 24책으로 편찬되었다. 『해국도지』는 모두 3차에 걸쳐 저술되고 증보되었다. 『해국도지』가 처음 발간된 것은 1842년 모두 50권의 1차본이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다음으로 5년 후인 1847년에 모두 60권의 1차 증보본이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다시 5년 후인 1852년(청 함풍 2)에 모두 100권의 2차 증보본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해국도지』 판본은 대개의 경우 2차 60권본과 3차 100권본이다. 출간된 당시부터 한동안 『해국도지』의 영향력은 매우 컸고, 저술된 내용이 자세하면서도 효용성까지 높아 다양한 판본이 출간되었고 비교적 널리 유통되었다.
  
외국에 관련된 지식이 소개된 『해국도지』는 해마다 중국을 다녀온 조선의 연행사(燕行使)를 통해서 조선에 유입되었다. 이 책은 조선에 전래된 이후 일부 지식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해국도지』를 소장하고 열람하여,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여, 서양 국가나 서양의 문물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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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내용'''==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입장을 가졌던 윤종의는 벽위신편(闢衛新編)에 『해국도지』를 이용하여 얻은 천주교에 비판적인 문장을 모두 수록하였다. 그러나 윤종의는 『해국도지』의 내용을 의심하여, 서양 국가에 대한 서술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전의 『명사(明史)』를 이용했다.
 
 
 
최한기는 ‘기’의 이론을 주장하면서, 『해국도지』의 서양 국가 서술을 다시 ‘기(氣)’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인용하여, 자기의 ‘지구전요(地球典要)’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전통적인 지위가 몰락하고, 동시에 조공체제가 붕괴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연행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던 방식에서 직접 해외를 유력하여, 서양을 경험하고 수용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인 유길준은 일본과 유럽과 미국을 경험하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을 참고하여,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저술하였다.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을 직접 경험하면서, 『해국도지』가 선진적인 지식을 담은 책이라는 지위가 깨지면서, 이후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해국도지』는 우리나라에 오경석이 처음 들여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조선의 역관(譯官)ㆍ서화가로서,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ㆍ진재(鎭齋),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지중추부사응현(膺賢)의 아들로서, 33인의 한 사람인 세창(世昌)의 아버지. 중인(中人) 출신으로 역관이 되어 청나라에 왕래하며 신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하였다. 가학(家學)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실학을 공부하였다. 1846년(헌종 12) 역과(譯科)에 합격하였다. 1853년(철종 4) 4월 북경행 사신의 역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가서 이듬 해 3월까지 머무르며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중국을 관찰하였다. 그 뒤 13차례나 역관으로 중국을 내왕하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ㆍ『영환지략(瀛環志略)』ㆍ『박물신편(博物新編)』 등을 비롯한 다수의 신서(新書)들을 구입해서 연구, 1853∼1859년경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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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00권의 내용 중 중요한 내용들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1과 권2 「주해편(籌海編)」은 『해국도지』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해안 방어 체제의 강화와 강역 방어‚ 국난의 예방 등을 역설한 내용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 안에서 다시 의수(議守), 의전(議戰), 의관(議款) 등 3개의 세부 목차가 설정되어 있다. 먼저 의수는 해안 및 변경 방어의 기본 원칙을‚ 의전은 서양 열강에 대한  대응 전략‚ 의관은 아편전쟁 이래 축적된 서양과의 외교 경험 등이 서술되어 있다.
  
1860년 당시 오경석은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 때, 서양 열강의 근대적 무력과 경제력 앞에 붕괴되고 있는 중국의 참상을 보았다. 조선에도 곧 서양 열강의 침입에 의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절감한 그는 구입한 신서들을 친우 유홍기(劉鴻基)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개화사상을 개진하여 유홍기의 개화사상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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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과 권4 「해국연혁각도(海國沿革各圖)」에서는 「지구정배면도(地球正背面圖)」‚ 「아세아주각도(亞細亞洲各圖)」‚ 「이부아주각도(利夫亞洲各圖)」‚ 「구라파주각도(歐羅巴洲各圖)」‚ 「아묵리가주각도(亞墨利加洲各圖)」 등으로 구성되어 세계지도와 각 대륙의 지도를 수록해 놓았다. 권5부터 권70까지는 베트남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일본, 인도, 이란, 터키, 이집트, 미국, 멕시코, 콜롬비아 등 여러 나라의 역사·지리와 다양한 환경에 관련된 내용들을 서술해 놓았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강상택, 『새로운 한국사의 이해』, 형설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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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환, 「18세기 후반~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베트남 인식」, 『조선시대사학보』58, 조선시대사학회, 20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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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載淵, 「海國圖志 收容 前後의 禦洋論과 西洋認識 -李圭景(1788~1856)과 尹宗儀(1805~1886)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17, 한국사상사학회, 2001.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107, 역사학회, 1985.     
 
*CHEN YANI, 「19세기 위원의 『해국도지』 판본비교와 조선 전래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분류:지리]][[분류:한문]][[분류:중국]][[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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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정치]][[분류:군사·국방]][[분류:병법·훈련법]][[분류:문헌]][[분류:중국]][[분류:조선후기]][[분류:조선후기]]

2017년 12월 22일 (금) 01:56 기준 최신판



청의 역사지리학자 위원(魏源)이 1844년 여러 국가의 정치·경제·인구·종교·지리 등을 설명해 놓은 지리서.

개설

청(淸)의 역사지리학자 위원(魏源)이 1844년 저술한 책으로, 여러 국가의 정치·경제·인구·종교·지리 등을 설명해 놓은 지리서이다. 중국 근대기에 저술된 지리서로는 최초로, 만국총지(萬國總志) 겸 다양한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한 세계사지(世界史志)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국도지』에는 세계 주요 국가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 기후‚ 물산‚ 교통‚ 무역‚ 민정(民情)‚ 풍속‚ 문화‚ 교육‚ 국제 관계‚ 종교‚ 역법(曆法)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아울러 저자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전함과 화륜선(火輪船)‚ 지뢰‚ 수뢰‚ 망원경 등 전술무기와 병기의 제조 방식과 생산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위원은 전통 사대부의 지식과 관습적 경험을 결합하여 청나라 정부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금문학파(今文學派)의 지도자였다. 그는 1822년(청 도광 2) 과거에 급제하여 내각(內閣) 중서(中書)가 되었다. 이후 1826년(청 도광 6) 정치·경제 문제 등에 대한 연구서의 성격을 갖는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의 편찬을 주도했다. 이후 위원은 계속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중시하는 성향을 보였다.

위원은 아편전쟁 당시 양절총독(兩浙總督)유겸(裕謙)의 막부(幕府)에서 군기(軍機)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학문에 대한 연구와 전쟁의 경험 등을 통해 서양의 군사력과 과학의 뛰어남을 절감했던 위원은 이후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그들의 뛰어난 능력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위원은 이 같은 생각을 갖고 『해국도지』를 저술했다. 특히 『해국도지』는 서양의 자료를 직접 번역하고 이용하여 저술했던 최초의 저술이었다. 비록 당시 중국에서 가지고 있던 서양과 서양인에 대한 선입견이 잘못 반영되어 있는 내용도 많았지만 근대 역사에서 『해국도지』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지 사항

책은 모두 100권 24책으로 편찬되었다. 『해국도지』는 모두 3차에 걸쳐 저술되고 증보되었다. 『해국도지』가 처음 발간된 것은 1842년 모두 50권의 1차본이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다음으로 5년 후인 1847년에 모두 60권의 1차 증보본이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다시 5년 후인 1852년(청 함풍 2)에 모두 100권의 2차 증보본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해국도지』 판본은 대개의 경우 2차 60권본과 3차 100권본이다. 출간된 당시부터 한동안 『해국도지』의 영향력은 매우 컸고, 저술된 내용이 자세하면서도 효용성까지 높아 다양한 판본이 출간되었고 비교적 널리 유통되었다.

구성/내용

총 100권의 내용 중 중요한 내용들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1과 권2 「주해편(籌海編)」은 『해국도지』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해안 방어 체제의 강화와 강역 방어‚ 국난의 예방 등을 역설한 내용 등이 서술되어 있다. 이 안에서 다시 의수(議守), 의전(議戰), 의관(議款) 등 3개의 세부 목차가 설정되어 있다. 먼저 의수는 해안 및 변경 방어의 기본 원칙을‚ 의전은 서양 열강에 대한 대응 전략‚ 의관은 아편전쟁 이래 축적된 서양과의 외교 경험 등이 서술되어 있다.

권3과 권4 「해국연혁각도(海國沿革各圖)」에서는 「지구정배면도(地球正背面圖)」‚ 「아세아주각도(亞細亞洲各圖)」‚ 「이부아주각도(利夫亞洲各圖)」‚ 「구라파주각도(歐羅巴洲各圖)」‚ 「아묵리가주각도(亞墨利加洲各圖)」 등으로 구성되어 세계지도와 각 대륙의 지도를 수록해 놓았다. 권5부터 권70까지는 베트남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일본, 인도, 이란, 터키, 이집트, 미국, 멕시코, 콜롬비아 등 여러 나라의 역사·지리와 다양한 환경에 관련된 내용들을 서술해 놓았다.

참고문헌

  • 노대환, 「18세기 후반~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베트남 인식」, 『조선시대사학보』58, 조선시대사학회, 2011.
  • 元載淵, 「海國圖志 收容 前後의 禦洋論과 西洋認識 -李圭景(1788~1856)과 尹宗儀(1805~1886)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17, 한국사상사학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