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령군 이간(厚寧君 李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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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9년(세종 1)~1450년(문종 즉위) = 32세]. 조선 전기 세종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서출 8남 13녀 중에서 제 7왕자. 봉작(封爵)은 후령군(厚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후궁(後宮) 이씨(李氏)인데, 또는 최숙의(崔淑儀)라는 설도 있다. 최숙의가 낳았다면, 낳은 2남 중에서 둘째들인데, 희령군(熙寧君)이타(李示+它*)의 동복아우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증 찬성신경종(申敬宗)의 딸인데, 딸 하나를 두었다.

짧은 생애

1429년(세종 11) 이간(李*)은 나이 11세 때 후령군에 봉해졌고, 1443년(세종 15) 나이 15세 때 어머니 이씨(李氏)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다가, 중병에 걸리니, 세종이 궁중에다 두고 의원으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10월 6일 향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갔다.

성품이 공손하고 신중했다. 『홍재전서(弘齋全書)』의 「후령군 이간묘치제문(厚寧君*墓致祭文)」에서 보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공손하고 신중했다.” 고 하였다.[『홍재전서(弘齋全書)』 권23 「후령군 이간묘치제문(厚寧君*墓致祭文)」]

묘소와 후손

시호는 희도(僖悼)이다. 1872년(고종 9)에 영종정경(令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처음에 도성 밖 연서(延曙), 곧 현재의 서울시 은평구에 있었으나, 1470년(성종 1) 경기도 금천군(衿川郡) 박달동(朴達洞)으로 옮겼다. 이 땅이 일제 강점기에 군용지로 수용되어 옮길 수 밖에 없자, 1941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 19-1 일명 화산봉(花山峯)으로 이장했다.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면덕리에 사당이 있다.

부인은 평산 신씨신경종의 딸인데, 1녀를 두었다. 딸은 참판(參判)좌리공신(佐理功臣)고천군(高川君)신정(申瀞)의 처가 되었는데, 신정은 신숙주(申叔舟)의 아들이다. 서출 자녀로는 2남 1녀가 있는데, 1자는 정해도정(貞海都正) 이집(李緝)이고, 2자는 암성수(巖城守) 이륜(李綸)이며, 1녀는 배맹종(裵孟宗)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전주이씨대관(全州李氏大觀)』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