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전(歡慶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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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명정전 서북쪽에 위치하는 침전형 전각.

개설

환경전은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조성할 당시, 수녕전(壽寧殿)·경춘전(景春殿)·인양전(仁陽殿)·통명전(通明殿)과 함께 내전의 전각으로 건립되었다(『성종실록』 15년 2월 11일). 사용 사례로 보아 환경전은 왕의 정침보다는 격이 낮고, 왕과 왕세자의 침전으로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치 및 용도

환경전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1483년에 조성될 당시 경춘전과 함께 침전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환경전에서 중종이 승하하였는데, 이때 소침(小寢)이라 하였다. 1645년(인조 23)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환경전에서 죽었고 소현세자의 침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인조실록』 23년 6월 10일). 영조는 환경전에 나아가 세자를 불러 정사를 의논하기도 하였으며, 영조 연간에 의소세손(懿昭世孫)은 세손으로 책봉된 이후 환경전에서 살았다. 또 1575년(선조 8)에는 명종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국장에서 빈전을 통명전에 설치하고 환경전을 거려청으로 사용하였다(『선조실록』 8년 1월 4일).

조선후기에 환경전은 왕실의 상장례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에는 현종의 혼전이 설치되었다(『숙종실록』 즉위년 8월 25일). 당시 혼전은 문정전(文政殿)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나, 이미 문정전에서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혼전 의례가 행해지고 있었으므로 환경전을 대안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후 1688년(숙종 14)에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승하하자, 이곳에 빈전을 설치하였다. 1701년(숙종 27)에는 경춘전에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여 다시 환경전에 빈전을 설치하였다.

환경전이 본격적으로 상장례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0년(순조 즉위) 정조의 빈전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1878년(고종 15) 철인왕후(哲仁王后)의 빈전이 설치되기까지 총 9차례의 빈전이 설행되었을 만큼, 환경전은 빈전 의례의 주요 전각이었다.

변천 및 현황

1483년에 조성된 환경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인조 연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소실되어 1634년(인조 12)에 인경궁(仁慶宮)의 문명전(文明殿)을 옮겨 지었다. 이때 규모는 정면 5칸에 사면 퇴를 갖춘 총 28칸 규모였다. 동월랑에는 전퇴를 갖추고 11칸이 조성되었으며 남월랑도 전퇴를 갖추고 13칸으로 조성되었다. 서월랑은 퇴 없이 12칸으로 조성되었다.

숙종 연간에는 혼전과 빈전으로 사용되었다. 통명전에 빈전이 설행될 때 환경전이 왕의 거려(居廬)로 사용되면서 점차 상장례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상장례 공간으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환경전 남월랑에 공묵합(恭默閤)이 형성된 것이다. 1757년(영조 33) 3월에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승하하자 빈전을 통명전에 설치하고 영조는 환경전 남월랑을 거려청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공묵합이라 명하고 현판을 내걸었다.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 빈전을 통명전에 설치하면서 환경전을 거려로 삼았고, 숙종 연간 장렬왕후와 인현왕후의 빈전이 환경전에 설치되면서 그 남행각을 거려로 삼았기 때문에 전례를 따라 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거려청의 이름을 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명에 따라 영춘헌에 빈전을 설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좁아 환경전으로 옮겨 설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1805년(순조 5) 정순왕후의 빈전,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빈전, 1830년(순조 30)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전이 차례로 환경전에 설치되었다.

1830년 환경전에 효명세자의 재실(梓室)을 모셔 두고 빈전 의례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화재가 발생하였다. 재실이란 왕세자의 시신을 담은 관이다. 불이 번져 환경전 남행각의 공묵합과 동쪽의 경춘전, 남쪽의 함인정(涵仁亭)과 숭문당(崇文堂)·영춘헌(迎春軒)·빈양문(賓陽門)까지 모두 탔다. 재실은 불길 속에서 겨우 꺼내어 통명전의 동쪽에 위치한 환취정(環翠亭)에 임시로 안치하였다가 도총부(都摠府) 건물로 옮겼다.

이날의 화재로 환경전은 새로 조성되는데, 이때 환경전 남쪽의 행각에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남행각의 정문으로 이명문(离明門)이 있었으며 그 남쪽에 체인문(體仁門)이 있었다. 그러나 1833년(순조 33) 재건 이후 환경전의 남행각 문은 개광문(開廣門)이 되었으며 그 남쪽에는 홍인문(弘仁門)이 설치되었다. 단순히 문의 이름이 변화한 것만은 아니며 물리적인 건물의 변화가 있었다. 특히 남행각에 공묵합이라는 재실이 그 형태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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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일어난 당시 환경전은 빈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재건될 때에도 빈전에 적합한 공간을 갖추었다. 그 예로 환경전의 앞마당에 4칸의 복도각이 조성되었다. 환경전의 본 건물 규모는 변화 없이 28칸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앞마당에 복도각이 조성되고 남행각의 공묵합은 규모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환경전은 계속 빈전 의례를 설행하여 1834년(헌종 즉위) 순조의 빈전, 1843년(헌종 9) 효현왕후(孝顯王后)의 빈전, 1849년(철종 즉위) 헌종의 빈전, 1860년(철종 11)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빈전, 1863년(고종 즉위) 철종의 빈전, 1878년 철인왕후의 빈전 등이 설치되었다. 1868년(고종 5)에 경복궁을 재건하고 북서쪽 영역에 태원전(泰元殿)과 문경전(文慶殿) 등의 상장례 공간을 조성하여 신정왕후(神貞王后)와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빈전과 혼전을 설치하면서 환경전의 빈전 기능은 끝이 났다. 고종이 경복궁에 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태원전을 조성할 때 태원전 남행각에 재실을 갖추고 그 이름을 공묵재(恭默齋)라 한 것은 환경전의 전례를 답습한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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