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유옹주(和柔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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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41년(영조 17)~1777년(정조 1) = 38세]. 조선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조태징(趙台徵)의 딸인 조귀인(趙貴人)이다. 부마는 창원 황씨(昌原黃氏)창성위(昌城尉)황인점(黃仁點)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화유옹주(和柔翁主)는 1741년(영조 17) 영조와 조귀인의 사이에서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친언니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1751년(영조 27) 영조는 호조 참판(參判)황자(黃梓)의 아들 황인점을 화유옹주의 부마로 결정하고, 창성위로 삼았다.(『영조실록』 27년 10월 5일)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 화유옹주와 황인점의 혼인을 거행하려고 하였으나, 영조와 이영빈(李暎嬪)의 딸인 화협옹주(和協翁主)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례가 연기되었다.(『영조실록』 28년 11월 27일) 그리하여 다시 한 해 뒤인 1753년(영조 29) 화유옹주와 부마 황인점의 혼인식을 거행하였다.

화유옹주는 1777년(정조 1)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정조(正祖)는 관곽(棺槨), 단주(鍛紬)·미두(米豆)·전포(錢布)를 부조하고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라고 하였다.(『정조실록』 1년 5월 21일)

한편 부마 황인점은 1784년(정조 8)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는데, 이때 함께 간 이승훈(李承薰)이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의 천주교 서적을 반입하였다.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들에 대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면서 이것이 문제가 되어 황인점은 관직이 삭탈되었다.(『순조실록』 1년 3월 3일)

묘소 및 후손

화유옹주의 묘소는 부마 황인점과 합장하였는데, 원래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126번지에 있었으나, 1992년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 산 32번지로 이장하였다.

화유옹주는 부마 황인점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1남은 의성현령(義城縣令)황기옥(黃基玉)이고, 1녀는 김제만(金濟萬)과 결혼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