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성여단(混成旅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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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양의 군사조직인 여단의 하나로 보병과 기병 이외에 포병, 치중병 등의 다양한 병종이 편제된 부대.

개설

여단(旅團, [Brigade])은 서양의 군사 편제 조직이다. 일본이 독일과 프랑스의 군사 편제를 도입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여단이라는 군사 조직이 탄생하였다. 여단은 연대보다는 크고 사단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군사 작전 시에는 사단과 동급의 부대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사단 규모의 대규모 병력을 운영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여단으로 군대를 편성하였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여단을 운영한 것도 과대한 군사비를 지출하지 않는 선에서 군대를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혼성여단은 사단과 달리 작전 운영 시 움직임이 용이한 대대를 가진 여단의 장점을 지녔으며, 포병과 기병, 군수품을 실어 나르던 치중병 등의 다양한 병종이 혼합된 것이다. 이로 인해 혼성여단은 기동성을 보유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병종의 기능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는 군사조직이었다. 대한제국기 혼성여단이 운영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한제국은 1898년(광무 2) 1월 군부(軍部)에서 각 부대를 여단으로 편제하였다(『고종실록』 35년 1월 26일). 그런데 당시 혼성여단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설치되기도 하였으나 국가의례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했다. 1902년 8월에 고종은 군대 사열의식을 관람하는 관병식(觀兵式) 때에 운영할 혼성여단의 편제를 명하였다(『고종실록』 39년 8월 18일). 고종은 칙령 제15호로 혼성여단편제(渾成旅團編制)를 재가하였다. 이때의 혼성여단은 보병 2개 연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여단장 1명은 참장(參將), 부관(副官) 2명은 정위(正尉)와 부위(副尉)가 담당하였다(『고종실록』 39년 8월 25일). 또한 육군참장(陸軍參將) 이근택(李根澤)을 혼성여단의 임시 여단장에 임용하였다(『고종실록』 39년 8월 25일). 고종은 관병식 이후에 임시 혼성여단을 해산하였다(『고종실록』 39년 9월 20일). 이듬해 고종은 또다시 관병식을 앞두고 칙령 제5호로 임시 혼성여단을 편성하였다(『고종실록』 40년 2월 20일) (『고종실록』 40년 2월 28일). 당시의 임시 혼성여단장에 원수부기록국총장(元帥府記錄局總長)인 육군참장(陸軍參將) 주석면(朱錫冕)을 임명하였다(『고종실록』 40년 2월 28일). 그리고 육군부령(陸軍副領) 현흥택(玄興澤)을 혼성여단의 보병 제1연대장, 육군부령 이민굉(李敏宏)을 제2연대장에 부임시켰다(『고종실록』 40년 3월 3일). 관병식 이후에는 재차 임시 혼성여단을 해산하였다(『고종실록』 40년 5월 18일).

조직 및 역할

1902년(광무 6) 8월 25일 칙령 제15호에 따라 혼성여단편제가 반포되었다. 혼성여단은 보병 2개 연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여단장 1인은 참장이며, 부관 2인은 정위와 부위였다(『고종실록』 39년 8월 25일).

혼성여단은 그 부대 성격상 전투에 동원되어야 함에도 대한제국기에는 관병식 등의 의례적 행사에 주로 동원되었다.

변천

1907년 4월 일제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조치로 대대적인 군제개편을 단행한다. 일제의 책동은 순종의 조칙이라는 형태로 공포되었다. 칙령 제22호로 시위혼성여단사령부관제(侍衛混成旅團司令部官制), 칙령 제23호 시위보병연대편제건(侍衛步兵聯隊編制件), 칙령 제24호 시위기병대편제건(侍衛騎兵隊編制件), 칙령 제25호 시위야전포병대편제건(侍衛野戰砲兵隊編制件), 칙령 제26호 시위공병대편제건(侍衛工兵隊編制件), 칙령 제27호 진위보병대대편제개정건(鎭衛步兵大隊編制改正件) 등이 반포되었다(『고종실록』 44년 4월 22일). 이때 혼성여단은 시위혼성여단체제로 바뀌면서 보병 2개 연대, 기병 1개 대, 공병 1개 대로 편성되었다. 육군참장 양성환(梁性煥)이 시위혼성여단장에 임명되었다(『고종실록』 44년 4월 30일). 혼성여단 사령부는 여단장, 참모, 부관 등 10여 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황궁 시위에 국한되었다.

그런데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면서 혼성여단도 해체되었다. 7월 31일 순종의 조칙은 미래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할 예정이니 황실 호위병만 놓아두고 군대를 해산한다고 하였다(『순종실록』 즉위년 7월 31일). 이어서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가 시위혼성여단장과 주요 지휘관들을 일본군 사령관저인 대관정(大觀亭)에 집결시켰다. 이병무는 황제의 군대해산 조칙을 낭독하고 10시에 하사관 이하 병사들을 훈련원 연병장에 집결시켜 해산식을 거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혼성여단도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일기(駐韓日本公使館日記)』
  •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혜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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