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심씨(賢嬪沈氏)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48년(세종 30) = ?]. 조선 1대 왕인 태조(太祖)의 8남인 의안대군(宜安大君)의 계비(繼妃). 본관은 부유(富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인 문신 심효생(沈孝生)이며, 어머니 고흥 유씨(高興柳氏)는 좌군도절제사(左軍都節制使)로 <대마도 정벌>에서 공을 세운 유습(柳濕)의 딸이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남편인 의안대군은 폐위되어 죽임을 당하자 함께 폐위되었다가 이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의안대군의 계비

심현빈(沈賢嬪)은 조선 초 문신이자 조선의 개국공신인 아버지 심효생(沈孝生)과 좌군도절제사(左軍都節制使)로 대마도 정벌을 이끈 유습(柳濕)의 딸인 어머니 고흥 유씨(高興柳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392년(태조 1) 태조는 훗날 의안대군으로 추증되는 8남 이방석(李芳碩)을 세자에 책봉하였다.(『태조실록(太祖實錄)』 1년 8월 20일) 세자인 이방석은 유현빈(柳賢嬪)과 결혼하였으나, 유현빈은 내시 이만(李萬)과의 간통사건으로 폐출되었다.(『태조실록』 2년 6월 19일)

그리고 1394년(태조 3) 심효생의 딸인 심씨가 세자빈에 간택되어 세자 이방석과 결혼을 하였고,(『태조실록』 3년 10월 16일) 3년 후인 1397년(태조 6) 태조는 세자빈 심씨를 봉하여 현빈으로 삼은 후 책(冊)과 인(印)을 하사하였다.(『태조실록』 6년 9월 27일) 이듬해인 1398년(태조 7) 심현빈이 세자 이방석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자,(『태조실록』 7년 5월 29일) 태조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권희(權僖)에게 명하여 왕손(王孫)의 개복신(開福神) 초례(醮禮)를 세자전(世子殿)의 남문(南門)에서 베풀게 하였다.(『태조실록』 7년 윤5월 6일)

제1차 왕자의 난과 폐위 후의 삶

태조는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고향에서 맞이한 부인으로 한경(韓卿)의 딸인 한씨와 개경에서 맞이한 부인 강윤성(康允成)의 딸인 강씨 등 두 명의 정처가 있다. 조선 개국 후 왕으로 등극한 태조는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여 정비(正妃)로 삼고 현비(顯妃)라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7일) 또한 강씨의 소생 중 막내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20일) 1396년(태조 5) 현비가 세상을 떠났는데,(『태조실록』 5년 8월 13일) 태조는 현비의 존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으로 하였다.(『태조실록』 5년 9월 28일)

한씨의 소생인 왕자들은 이러한 태조의 행동과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심효생 등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1398년(태조 7)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자, 이방원은 여러 왕자들을 포섭하고 이숙번(李叔蕃),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등의 휘하 부하들을 시켜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숙청하였다.(『태조실록』 7년 8월 26일) 이 때 세자 이방석은 먼 지방에 안치하기로 하였으나,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태조실록』 7년 8월 26일)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1403년(태종 3) 심현빈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는 신하들의 상언으로, 무안군(撫安君)이방번(李芳蕃)의 부인 왕씨(王氏)와 함께 외방으로 내쳐졌다.(『태종실록(太宗實錄)』 3년 1월 4일) 그러나 이후 심현빈은 태종의 보살핌을 받아 태종으로부터 콩과 쌀을 받기도 하였다.(『태종실록』 3년 11월 4일),(『태종실록』 5년 1월 8일) 그런 가운데 공민왕의 후궁인 이혜화궁주(李惠和宮主)가 여승이 되어 정업원(淨業院)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심현빈을 정업원의 주지(住持)로 삼았다.(『태종실록』 8년 2월 3일)

1431년(세종 13) 세종(世宗)은 심현빈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예우하였으며, 수신전을 내렸다.(『세종실록(世宗實錄)』 13년 7월 30일) 1448년(세종 30) 심현빈이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심현빈의 예장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때 세종은 예장을 할 것인가, 만약 예장을 할 것이라면 어떤 예(例)를 쓸 것이며, 또한 의안대군에게 입후된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삼년상을 입어야하는지 등에 대하여 의논하였다.(『세종실록』 30년 11월 23일)

묘소와 후손

심현빈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에 남편 의안대군의 묘와 함께 있다.

심현빈과 의안대군의 사이에는 1남이 있었는데, 어려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후사가 없는 심현빈과 의안대군의 뒤를 금성대군으로 잇게 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세종실록』 19년 6월 3일)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지두환, 『태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