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의성(平義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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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江戶)시대 대마도의 제2대 도주.

개설

평의성은 1604년 1월 15일에 대마도(對馬島) 제1대 도주(島主) 평의지(平義智)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15에 평의지가 사망하자 제2대 도주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대마도의 도주는 조선의 수문장 역할과 일본 강호막부와의 외교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평의성은 양란 이후 조·일 간의 무역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인물이다.

활동 사항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일 관계가 단절된 후, 양국이 다시 통교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의외로 강화교섭을 빨리 진척시켰다. 조선에서는 1604년(선조 37) 승려 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을 탐적사(探賊使)로 파견하여, 대마도를 거쳐 경도(京都)로 갔다. 이들은 덕천가강(德川家康)돠 덕천수충(德川秀忠)을 만나 일본의 국정을 살피고 귀국하였으며, 이때 일본과의 교섭 당시 조선에서 제시한 장군(將軍)의 국서(國書)와 전란 당시 선대(先代) 국왕의 묘를 파헤친 범릉적(犯陵賊)을 소환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일본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교섭은 진척을 보았다. 이후 1607년(선조 40) 조선에서 정사(正使)여우길(呂祐吉) 일행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강호(江戶)에 파견하면서 양국의 국교가 정식으로 회복되었다. 2년 후인 1609년(광해 1)에는 양국 간의 통교를 정상화한 조약이라고 할갑다 수 있는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었고, 1611년(광해군 3)부터는 일본의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이 정식으로 조선에 도항해 옴으로써 외교 및 교역 관계가 모두 재개되어 양국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조선은 1617년(광해군9)과 1624년(인조 2)에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하고,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 그리고 1655년(효종 6)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 조선 사자(使者)가 모두 다섯 차례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때마다 평의성은 강호까지 사자를 수행하였다. 1624년 회답겸쇄환사 때 정립(鄭岦) 등이 장군이 사신에게 수여한 은(銀)을 받지 않고 대마도에 주어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인을 쇄환하는 자금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회답겸쇄환사가 귀국한 후 대마도에서 이를 다시 조선에 보내왔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절반은 받아서 부산 동래부에서 왜관(倭館)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사용하게 하고 절반은 쇄환에 드는 뱃삯과 식량 구비의 비용에 쓰게 하고 나머지는 사신들에게 처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정립 등이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고 대마도에서도 다시 사신을 보내어 받지 않았다(『인조실록』 3년 5월 1일). 결국 이듬해 2월에 예조에서 이전 지시에 따라 분급하는 것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다.

평의성은 그의 가신(家臣)이었던 유천조흥(柳川調興)과 대립하다 조·일 간에 왕래하였던 국서를 위조하고 고친 일이 있었는데, 1631년 당시 이 일이 발각되어 3대 장군 덕천가광(德川家光)이 재판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천조흥이 유죄 판결을 받아 유배형에 처해졌고, 국서를 고치는 데 있어서 실무를 담당하였던 자들도 처형되었다. 그러나 평의성은 죄를 받지 않고 계속해서 조선과의 통교무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덕천가광이 평의성의 과실을 인지하였음에도 유천조흥을 처벌한 것은 조선과의 무역을 계속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만일 평의성을 처벌할 경우 왜란 이후 그를 매개로 유지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 하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평의성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담당한 역할이 컸던 것이다.

이 ‘국서개작사건(國書改作事件)’, 혹은 ‘유천사건[柳川一件]’은 평의성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조선은 이 사건이 양국 관계에 몰고 올지도 모르는 파장 때문에 긴장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직전 후금(後金)과의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조선의 대일정책은 자연히 현상을 유지하고 그것을 잘 관리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사이에 평의성은 덕천가광의 지시를 받아 조선에 마상재(馬上才)를 요청하여(『인조실록』 12년 12월 10일) 마상재가 강호까지 왕복하였다. 당시 일본에 갔던 역관(譯官)홍희남(洪喜男)은 평의성의 승소(勝訴)와 마상재 요청의 의도는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교린(交隣)에 성의가 있는가 하는 것과 대마도 도주가 대조선 외교에 주선 능력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라고 하였고, 이 때문에 평의성이 마상재 파견에 감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인조실록』 13년 6월 13일). 국서개작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는 장군의 호칭으로 ‘대군(大君)’을 사용하게 되는 등의 외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국서개작사건’ 이후 강호막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고 시도하였다. 1656년(효종 7년) 평의성이 병이 들어 조선에 의원을 구하자 조선에서는 이를 허락하여 의원을 대마도로 보냈다(『효종실록』 7년 12월 24일). 그러나 평의성은 이듬해인 1657년(효종 8) 10월 26일 54세의 나이로 강호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평의진(平義眞)이 뒤를 이었다.

묘소

장기현(長崎縣) 하현군(下縣郡) 엄원정(嚴原町)의 만송원(万松院).

참고문헌

  • 『日本人名大辭典』, 講談社, 2009.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三宅英利 著·손승철 譯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이론과실천, 1991.
  • 손승철 편저, 『근세 한일관계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87.
  • 요시노 마코토 지음·한철호 옮김,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 년사』, 책과함께, 2005.
  • 田代和生 著·손승철 譯, 『근세 한일외교비사』, 이론과실천, 1988.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 2011.
  • 山本博文, 『對馬藩江戶家老』, 講談社, 1995.
  • 유재춘, 「임란후 한일국교 재개와 국서개작에 관한 연구」, 『강원사학』 2,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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