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의방(平義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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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江戶)시대 대마도의 제5대 도주.

개설

조선시대에 일본 강호막부와 조선과의 외교 창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대마도(對馬島)의 도주(島主)이다. 평의방은 1684년 1월 19일 대마도 3대 도주 평의진(平義眞)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694년에 4대 도주였던 평의륜(平義倫)이 일찍 사망하여 그의 양자(養子)가 되어 제5대 도주가 되었다. 종의방(宗義方)이라고도 하였다.

활동 사항

1711년에 일본의 제6대 장군(將軍) 덕천가선(德川家宣)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였을 때 강호까지 통신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장군의 정치 고문이었던 신정백석(新井白石)이 대등과 간소화라는 기본 방침을 세우고 장군 호칭을 대군(大君)에서 국왕(國王)으로 변경할 것, 장차 장군이 될 약군(若君)대한 빙례(聘禮)의 중지, 예조에서 노중(老中)에게 보내는 폐백(幣帛)과 서계(書契)의 정지, 강호까지 가는 중간에서 통신사에게 베풀어 주는 연향(宴享)의 감소, 강호성(江戶城)에 들어가 장군을 만날 때 국서를 정사(正使)가 받들고 전달할 것 등 통신사 대우의 적정화, 경비의 절약, 일본의 예(禮)에 따르게 한다는 등 통신사 접대 규정을 개정하려고 하였기 때문에(『숙종실록』 37년 4월 12일) 통신사는 출발 전부터 조선 조정 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숙종실록』 37년 5월 13일)(『숙종실록』 37년 5월 27일).

또한 강호에서는 국서(國書)에 조선 왕과 일본 장군의 휘자(諱字)를 각각 범하였다는 이유로 분쟁이 발생하였다. 일본에서는 종래 범휘(犯諱)의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 역시 신정백석의 조일 양국의 대등화라는 방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숙종실록』 37년 12월 30일). 결국 이 문제는 양국이 각자 국서를 고쳐서 대마도에서 교환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이 분쟁 과정에서 평의방은 통신사행이 귀국길에 대판성(大阪城)에 도착하였을 때 강호성에서 범휘자를 고쳐서 내렸다는 강호에서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통신사의 정사였던 조태억(趙泰億)은 조선 조정에 즉시 알렸다(『숙종실록』 38년 1월 9일). 결국 대마도에서 고쳐진 국서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통신사는 귀국하였지만 이후 처벌을 받았다(『숙종실록』 38년 3월 9일)(『숙종실록』 38년 3월 27일).

상훈 및 추모

평의방은 1718년 9월 5일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장기현(長崎縣) 하현군(下縣郡) 엄원정(嚴原町)의 만송원(万松院).

참고문헌

  • 三宅英利 著·손승철 譯,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이론과 실천, 1991.
  • 한일관계사학회,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1』, 자작나무, 1998.
  • 현명철, 『19세기 후반의 대마주와 한일관계』, 국학자료원, 2003.
  • 李元植, 『조선통신사』, 민음사, 1991.
  • 『日本人名大辭典』, 講談社, 2009.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