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저강정토(婆猪江征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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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년 조선이 파저강 일대를 정벌해서 큰 전과를 올린 사건.

개설

조선은 여진 세력의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때 건주위(建州衛)의 유력 추장이었던 이만주(李滿住)가 명의 승인을 받고 압록강의 지류였던 파저강 일대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 조선은 파저강 일대로 이주해 온 이만주 세력을 제압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1432년(세종 14) 12월 야인 400여 기가 평안도 여연(閭延) 지역을 침입해 조선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다양한 대응책들을 의논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세종 등은 정벌을 통해 조선의 위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신료들이 침입한 주체를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함부로 군사를 출병시킬 수 없다며 정벌 자체를 반대했다.

하지만 세종은 1433년(세종 15) 3월 정벌군의 규모를 15,000명으로 정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최윤덕(崔潤德)에게 병력을 인솔하고 출병할 것을 지시했다. 최윤덕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15,000명의 군사를 동원했다. 이들을 다시 7개의 부대로 나누어 4월 19일 파저강 정벌을 단행했다.

역사적 배경

명이 본격적으로 여진 지역에 대한 관리를 시작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했던 시기는 영락제(永樂帝)의 집권기였다. 당시 명은 타타르[韃靼], 오이라트[瓦剌] 세력과 전쟁을 거듭했고 이 여파는 요동은 물론 만주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세종대 이만주(李滿住) 세력이 파저강 일대로 이주해 왔던 것은 이러한 정세와 관련 있었다.

영락제는 단순히 여진 세력들을 회유하는 수준을 넘어 이들을 명의 위소(衛所) 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명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의미했다. 명의 이런 움직임은 북방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여진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던 조선과의 충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조선은 여진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파저강이만주 세력에 대한 정벌을 두 차례 단행했다. 세종대 조선은 압록강 일대의 여진 세력에 대한 군사 행동을 전개했고, 명은 두만강 지역의 야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여진 지역에 대한 주도권 문제를 두고 양국이 대립하는 양상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태종의 노력으로 양국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어 세종대에 이르러 안정 단계에 접어든 이후 서로가 상대를 자극할 수 있는 외교적 행동을 자제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종대 조선과 명의 여진 지역에서의 활동 이면에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조선과 명은 각각 두만강 북변 일대와 압록강 북변 일대를 자신들의 주도권이 확실히 보장되는 지역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발단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은 외부 세력에 대한 출병을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방 지역에 대한 활발한 탐색을 통해 여진 세력에 관련된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었다. 특히 여진 세력의 근거지나 주요 추장의 동향에 관련된 정보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건주위의 유력 추장이었던 이만주가 명의 승인을 받고 압록강의 지류였던 파저강 일대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 조선은 사실상 자국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던 파저강 일대로 이주해 온 이만주 세력이 명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자 이들을 제압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조선은 여진 세력의 여연 침입 사건을 계기로 파저강 일대 이만주 세력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단행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여연을 침입했던 여진 세력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종이 정벌을 추진했다는 것은 외부 세력의 침입이 출병의 근본 원인이라기보다는 정벌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세종대 정벌의 논의 과정과 시행을 전후로 나타났던 조정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던 대명의식의 실체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세종은 누구보다도 사대명분을 강조한 왕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정벌을 준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사대명분이나 황제의 지시마저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정벌 이후 명에서 조선과 건주위 야인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신을 이전과는 달리 박대했던 부분에서도 대명의식의 실체가 확인된다. 대외정벌을 추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왕과 많은 수의 신료들이 가지고 있던 양면적 대명의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경과

세종은 1433년(세종 15) 3월 정벌군의 규모를 1만 5천 명으로 결정했다. 처음 3천 명으로 논의되었던 정벌군의 규모는 5배까지 증가했다. 그리고 평안도도절제사최윤덕에게 정벌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최윤덕은 1만 5천 명의 병력을 7개 부대로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9일에 파저강 정벌을 단행했다(『세종실록』 15년 5월 7일).

4월 25일 평안도감사이숙치(李叔畤)의 보고를 시작으로 5월 3일까지 북정(北征)에 대한 승전 보고가 이어졌다. 5월 5일에는 최윤덕이 북방 평정에 대한 하례전(賀禮箋)을 올렸다(『세종실록』 15년 5월 5일). 파저강 정벌의 대성공은 이후 조선의 대외정책과 국가 운영 방식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시행되었던 파저강 정벌은 조선전기에 시행되었던 군사행동 중 가장 큰 전과를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는 조선이 대외정벌을 지속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정벌의 성과를 국내정치에 활용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 『서정록(西征錄)』
  • 강성문, 「세종조 파저야인의 정벌연구」, 『육사논문집』30, 『한국군사학논집』30, 육군사관학교, 1986.
  • 노영구, 「세종의 전쟁수행과 리더십」, 『오늘의 동양사상』19, 예문동양사상연구회, 2008.
  • 이규철, 「세종대 대외정벌 정책의 본격화와 대명의식」, 『한국문화』67,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4.
  • 정다함, 「정벌이라는 전쟁/정벌이라는 제사 -세종대 기해년 “동정”과 파저강 “야인정벌”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52, 고려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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