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궁(梨峴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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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된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의 잠저(潛邸).

개설

이현궁(梨峴宮)은 선조와 공빈김씨(恭嬪金氏) 사이에서 출생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기 이전에 살았던 궁가(宮家)이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왕으로 즉위한 후 본궁(本宮)으로 불리면서 별궁(別宮)의 기능을 하였으나, 정조 즉위 후 해당 터에 장용영(壯勇營)이 들어서면서 훼철되었다.

위치 및 용도

이현궁은 광해군의 잠저였다가 왕실의 별궁이 된 궁가로 종묘 동쪽에 있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종로구창경궁로 일대이다.

변천 및 현황

이현궁은 광해군이 왕자 시절에 살던 궁가로 세자로 책봉되고 왕으로 즉위하면서 본궁이 되었다. 대개의 본궁처럼 이현궁도 내수사(內需司)의 관리하에 별궁의 기능을 했다(『광해군일기』 2년 12월 28일).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이현궁은 본궁 기능을 상실하였고, 인조의 사친인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머무는 계운궁(啟運宮)으로 불리게 되었다(『인조실록』 1년 3월 23일).

연주부부인은 계운궁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후 다시 국가에 이속되어 이현궁이라는 명칭과 별궁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1631년(인조 9)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가례처로 사용되었으며, 1632년(인조 10)에는 창덕궁 수리 중에 인조가 잠시 머무는 이어소(移御所)로 쓰였다. 이후에는 능원대군(綾原大君)이보(李俌)로 하여금 살게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대왕 행장].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후에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되는 숙의장씨(淑儀張氏)의 가례청으로 활용되었으며, 숙빈최씨(淑嬪崔氏)의 궁방(宮房)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소현세자빈인 민회빈(愍懷嬪)의 신주 임시봉안소로 쓰이기도 했다(『숙종실록』 12년 3월 25일)(『숙종실록』 37년 6월 22일)(『숙종실록』 44년 4월 14일).

영조가 즉위한 후에는 간간히 영조의 이어소로 쓰였을 뿐 주인 없는 궁으로 관리·수보만 되다가, 1787년(정조 11)에 이르러 정조대에만 있었던 군영(軍營)인 장용영이 들어섰다. 정조가 훙서(薨逝)하자, 장용영은 폐지되었고 군영의 영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동영(東營)으로 사용되었다. 헌종 재위 시에는 총융영(摠戎營)이 이름을 바꾼 총위영(總衛營)의 신영(新營)으로 잠시 사용되다가 다시 훈련도감 동별영의 영사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곳에 선혜청(宣惠廳)의 동창(東倉)이 자리를 잡았다.

1894년(고종 21) 이후에는 새로 중앙군으로 조직된 친위대의 2대대가 있었다. 이후 일본군 51연대가 주둔했고 러일전쟁 후에 이 군대의 기지를 용산으로 옮기면서, 1909년(융희 3) 9월 7일에 전 어영청(御營廳) 자리에 지어진 동아연초 공장에 근무하는 이들을 위한 사택으로 대여되었다. 사택 뒤쪽의 건물들은 경성재판소 관사를 짓기 위한 가옥 철거 건이 결정되면서 사라졌다.

이후 이현궁이 있던 서쪽 이현대로에는 전찻길이 생겼다.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고 관광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전찻길이 생겨난 이현대로 주변은 급격한 변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동아연초 사택은 전매지국이 되었다. 1950년대에는 동대문경찰서 동쪽에 극장도 생겼다. 현재는 혜화경찰서와 서울 선거관리위원회와 국민건강보험공단 빌딩이 들어서 있다. 동대문경찰서와 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상업 용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내각일력(內閣日曆)』
  • 『대동지지(大東地志)』
  • 『장용영고사(壯勇營故事)』
  • 『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 『총위영사례(總衛營事例)』
  • 『훈국총요(訓局總要)』「본영도형(本營圖形)」장서각 소장(K2-4366)「본영도형(本營圖形)」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영도형(本營圖形)」장서각 소장(K2-4365).
  • 정정남, 「壯勇營의 漢城府內 立地와 營舍의 建築的 특성-『本營圖形』의 분석을 중심으로-」, 『藏書閣』 제21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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