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각(吹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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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角)을 일정한 신호 체계로 부는 것 또는 각을 부는 집단.

개설

각은 고대부터 위험을 알리는 신호용 악기로 쓰였다. 각을 불어 상황을 전달하는 방식은 특히 군대에서 유용하게 쓰였고, 군사를 움직이게 하는 신호음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이러한 관습이 이어지면서 취각(吹角)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행차할 때, 발인(發靷) 반차(班次)할 때, 조회(朝會)할 때, 군사를 소집할 때 등에 사용되었다. 즉 취각을 배치시켜 왕을 호위하고, 취각의 소리로 주위를 집중·환기시키거나 군사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운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취각은 고려시대에 의위(儀衛)와 노부(鹵簿)를 구성하는 취각군(吹角軍)에서 나타난다. 취각군의 전통이 조선전기로 연계되면서 취각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취각을 행하는 자, 즉 각을 부는 연주자를 취라치[吹螺赤]라고 불렀다. 취라치를 선발하는 기준에는 각 연주 실력뿐 아니라 말을 타고 달리며 활 쏘는 무예와 걷거나 뛰다가 활을 쏘는 기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세종실록』 16년 4월 5일).

취각은 군사를 정돈하는 일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평소에 이를 선별하여 훈련해두어야만 했다. 취각은 높은 음, 낮은 음, 긴 음, 짧은 음을 복합적으로 구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연습한 후 현장에 투입되어 군사들의 앉고, 서고,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행동을 좌우하였다[坐作進退]. 취각의 기능은 조선후기에 취타내취로 계승되었다.

절차 및 내용

취각은 노부, 반차, 조회, 군사 소집 등에서 용례가 발견된다. 조선전기 대가노부와 법가노부에서 대각 2, 중각 2, 소각 2 이상 6개의 각이 수반되었고, 소가노부에 대각 2, 소각 2 이상 4개의 각이 편성되었다. 노부의 위격에 따라 취각의 구성과 수량을 차별했다. 노부에 구성된 취각은 궁중 행차에 수반되어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고 주위를 경계하며 호위하는 기능을 하였다.

또한 발인 반차에 투입되고(『단종실록』 즉위년 8월 28일), (『예종실록』 즉위년 11월 24일), 신주를 종묘로 옮기는 행렬에 편성되었으며(『단종실록』 2년 7월 15일), 조회에 참석하여 시위하기도 하였다.

취각의 핵심 역할은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왕의 명령을 받아 각을 불어 군사들을 지정한 장소에 소집했는데, 이를 취각령이라고 한다. 즉 왕이 군사 소집 명령을 내리면 내취각인(內吹角人)이 각을 한 번 불고, 병조 소속의 외취각인(外吹角人)이 누문(樓門)에 올라가서 그 소리에 응답하였다. 그리고 사방의 높은 곳에 나누어 올라가서 군사와 말이 다 모일 때까지 지속적으로 불었다. 깊은 밤에 취각령이 내려진 경우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므로, 각 소리를 기준으로 집합하기도 하였다. 중군은 대각(大角), 좌군은 중각(中角), 우군은 소각(小角)을 불면서 모였다.

이렇듯 취각은 군대 동원이라는 민감한 사안과 깊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취각령이 있을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낸다든지(『태종실록』 10년 5월 14일), 취각하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대궐에 나오지 않는다든지(『태종실록』 11년 12월 12일), 개인이 함부로 사용할 경우 크게 처벌받았다(『세조실록』 3년 10월 9일), (『세조실록』 8년 1월 2일).

    1. 00016711_그림1_『국조오례서례』 권4 군례 형명도설의 대각(왼쪽)과 소각(오른쪽)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취각은 민간에서 비상시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비상 상황을 대비하여 각 고을의 아전[人吏]·일수(日守)·관노(官奴) 중에서 2~5인을 골라 취각의 신호 체계를 미리 교육시켰다(『문종실록』 1년 2월 1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춘관통고(春官通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이숙희, 『조선후기 군영악대』, 태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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