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관(天主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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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진출한 서양 선교사들이 북경에 지은 4개의 천주관.

개설

천주관은 북경에 서양 선교사들이 건립한 천주당을 의미한다. 북경에는 1605년 이후 총 네 개의(4개의) 천주당이 건축되었는데 가장 먼저 건축된 것은 마테오리치([利瑪竇], Matteo Ricci)가 주도한 남당(南堂)이다.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 중심부에 진출하고자 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의 노력은 지금의 마카오인 조경에 도착한 지 약 20여 년 만에 가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마테오리치와 그의 동료들은 1601년 북경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마땅한 거처가 없어 외국 사신의 숙소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605년에 이르러 마테오리치는 북경의 선무문(宣武門) 안에 토지를 매입한 뒤 판토하와 함께 작은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 최초의 천주관이 남당이다. 남당은 건축 외관은 중국 전통 양식을 따랐지만 내부 장식은 유럽 성당의 양식을 채택하였다. 이후 남당은 수차례 중건되었고 주교구(主敎區)가 되었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 불리오([利類思], Louis Buglio)와 마갈렌스([安文思], Glbriel de Magalhaens)가 1651년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토지에 성당을 건축하여 1655년에 완공하였는데 이를 동당(東堂)이라고 부른다. 북당(北堂)은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드 폰타네([洪若翰], Jean de Fontaney)가 키니네를 사용하여 강희제의 학질(말라리아)을 고쳐 준 공로로 하사받은 서안문(西安門) 밖의 부지에 건축한 서양식 건물로, 1703년에 완공되었다. 서당은 네 천주관 중 가장 역사가 짧고 규모가 작다. 1723년 옹정제 때 완공되었다. 네 천주관 중 중국 교회의 중심은 남당이었지만 전례(典禮) 논쟁 이후 예수회의 위상이 약화되자 점차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심이었던 북당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승훈은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이승훈의 편지를 가지고 윤유일이 처음 방문한 곳 역시 북당이었다. 선교사 파견은 주교의 권한이라는 판단으로 북당의 선교사들은 윤유일을 남당으로 인도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주문모 신부의 파견이 결정된 것은 주교구였던 남당이었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자수를 순조에게 보고한 기록에서 이승훈이 북경 천주교회에 선교사를 요청하자 천주관에 머물고 있던 서양 사람들이 중국인 신부를 파견한 것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때의 천주관은 남당을 의미한다(『순조실록』 1년 3월 15일). 홍대용이 방문하였던 천주관 역시 남당이었다.

변천 및 현황

마테오리치가 토지를 1605년에 매입하여 건축한 최초의 남당은 1610년에 우르시스([熊三拔], Sabbatino de Ursis)에 의하여 르네상스 양식의 유럽식 성당으로 재건축되었다. 남당은 이후 다시 아담 샬([湯若望], Johann Adam Schall von Bell)에 의하여 재건축되었다. 순치제의 신임을 얻었던 아담 샬은 순치제로부터 하사받은 토지에 바로크양식의 천주당을 건축하였다. 이 재건축은 1650년에 시작되어 1652년에 완성되었다. 이후 1703년 지진으로 남당이 손상되자 강희제의 지원을 받아 바로크양식으로 중건되었다. 이후 여러 번의 지진을 겪으며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고 1775년에 건륭제의 하사금으로 중건되었을 때 규모가 3층에 이르게 되었다. 다른 세 천주관도 지진·화재 등 여러 차례 손상을 입고 그에 따라 중건되었다.

형태

초기에는 외부는 중국 전통 양식을 따르고 내부를 서양식으로 꾸몄지만 여러 차례 중건의 과정을 거쳐 바로크식의 웅장한 서양식 건축물로 변모하였다.

참고문헌

  • 矢澤利彦, 『北京四天主堂物語: もう一つの北京案內記』 東京: 平河出版社, 1987.
  • 이은영, 「조선 후기 연행사의 천주당 방문과 서양 문물 체험」, 덕성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