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사(天龍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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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대에 불사 자금을 요청했던, 일본 경도의 임제종 사찰.

개설

천룡사(天龍寺)는 임제종(臨濟宗) 천룡사파(天龍寺派)의 대본산(大本山)이다. 1339년(고려 충숙왕 후 8)에 막부의 지원을 받아 개창하였지만, 불사 자금이 부족하여 원나라와 교역을 통해 창건 비용을 충당했다. 1463년(세조 9)에 일본 사신으로 온 승려 준초(俊超)와 범고(梵高) 등이 천룡사 중건 비용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한편 유구국에 있던 천룡사에서도 1493년(성종 24)에 불사 자금을 요청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절의 연혁

천룡사는 일본 경도(京都) 차아(嵯峨)의 람산(嵐山)에 소재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실정막부(室町幕府)를 수립한 초대 장군 족리존씨(足利尊氏)의 지원을 받아 1339년에 몽창소석(夢窓疎石)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족리존씨와 광엄상황(光厳上皇)이 토지를 기부했지만 사찰을 짓는 비용을 충당하기에 부족하여 원나라와의 무역을 재개하고 그 이익을 조영 비용에 충당하기로 했다. 이때 원나라와 교역했던 무역선을 천룡사선(天龍寺船)이라고 불렀다.

원래 천룡사 일대는 평안시대(平安時代) 초기 차아천황(嵯峨天皇)의 황후 귤가지자(橘嘉智子)가 개창한 단림사(檀林寺)가 있던 곳이었다. 수백년이 지나 폐허가 되었지만, 후차아천황(後嵯峨天皇)이 황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와서 머물렀고, 이어서 구산천황(亀山天皇)도 황위에서 물러나 이궁(離宮)을 짓고 구산전(亀山殿)이라고 불렀다. 그 후 몽창소석에 의해 구산전이 법당으로 개조되어 천룡사가 창건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천룡사는 1356년, 1367년, 1373년, 1380년, 1445년, 1468년, 1815년, 1864년 8차례에 걸쳐 큰 화재 및 병화(兵火)가 있었다. 특히 1445년과 1468년의 피해가 컸다. 이때의 피해는 1585년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시주를 받고서야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15년에 다시 화재를 당하였고, 1864년에 합어문(蛤御門)의 변란이 일어나 큰 타격을 입으면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지금 사찰 내에 있는 선당(禪堂), 경장(經藏), 종루(鍾樓), 중문(中門), 칙사문(勅使門)과 탑두(塔頭) 등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대부분은 명치시대(明治時代)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한편 천룡사는 2,500여 점의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2) 조선과의 관계

1463년에 일본 사신으로 온 승려 준초와 범고 등이 일본 국왕의 전언이라고 하면서 천룡사 중건 비용을 요청하였다(『세조실록』 9년 윤7월 24일). 하지만 이때 조선 조정에서 천룡사 불사금(佛事金)을 주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3) 유구국의 천룡사

『조선왕조실록』에는 경도의 천룡사와는 다른 곳의 천룡사가 한 곳 더 등장한다. 1493년에 유구국(琉球國) 왕이 사신 범경(梵慶)을 보내어 와서 사찰을 건립할 불사금을 요청하고, 또 동철(銅鐵)·사어피(沙魚皮)·주홍(朱紅)을 사가지고 가서 천룡사를 재건하는 데 사용하고자 하였지만(『성종실록』 24년 6월 6일) 조선 조정의 허락 여부는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천룡사는 경도의 람산에 있는 천룡사와는 다른 사찰로, 오키나와에 소재한 사찰이었으나 그 소재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 佐佐木昇 著, 『(知識ゼロからの)京都の古寺入門』, 東京: 幻冬舍, 2010.
  • 相賀徹夫 著, 『探訪日本の古寺』 9: 京都四, 東京: 小學館,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