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주진(昌洲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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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평안도에 있던 진.

개설

창주는 본래 고려시대에 장정현(長靜縣)이었다. 이후 1035년(정종 1) 백성들을 이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방어사를 배치하면서 창주로 승격되었다. 이후 대몽항쟁기 동안 국경 지역의 중요한 방어진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점차 관리 영역을 넓혀갔던 창주는 세종의 재위기에 진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방어진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창주진에는 갑암보(甲巖堡), 운두리보(雲頭里堡), 묘동보(廟洞堡), 어정보(於汀堡), 대길호리보(大吉號里堡)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따르면 창주진에는 첨사(僉使), 대장(代將), 별장(別將), 병방군관(兵房軍官), 군기감관(軍器監官), 파수감관(把守監官)을 각각 1명씩 두었다. 또한 아전(衙前) 5인, 통인(通引) 4인, 사령(使令) 6인, 마병장무대(馬兵壯武隊) 93명, 보병장무대(步兵壯武隊) 156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정사(精抄) 198명, 갑사(甲士) 24명, 성정군(城丁軍) 18명, 양삼수(良三手) 36명, 봉수군(烽軍) 45명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갑암보에는 방군관(房軍官), 권관(權管), 대장, 군기감관(軍器監官), 파인별장(把人別將), 수감관을 각각 1명씩 두었다. 아전과 통인을 3명씩, 마병장무대 6명, 보병장무대 3명, 정초 6명, 성정군 9명, 양삼수 12명, 봉수군 45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운두리보에는 권관, 대장, 별장, 병방군관, 군기감관, 파수감관이 각각 1명씩 소속되어 있었다. 아울러 아전 3인, 통인 2인, 마병장무대 3명, 정초 20명, 성정군 18명, 양삼수 2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묘동보에도 권관, 대장, 별장, 병방군관, 군기감관, 파수감관이 각각 1명씩 소속되어 있었다. 3명의 아전과 2명의 통인이 배치되어 있는 것도 운두리보와 같았다. 다만 마병장무대는 9명, 보병장무대는 3명, 정초는 33명, 성정군은 20명, 양삼수는 6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정보에는 권관과 대장, 별장, 병방군관, 군기감관, 파수감관이 각각 1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전 3인, 통인 2인, 마병장무대 12명, 보병장무대 42명, 정초 66명, 양삼수 9명, 봉수군 45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대길호리보에는 권관, 대장, 별장, 병방군관, 군기감관, 파수감관이 각각 1명씩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전 3인, 통인 2인, 마병장무대 27명, 보병장무대 27명, 정초 15명, 갑사 18명, 성정군 12명, 양삼수 3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봉수군은 배속되어 있지 않았다.

변천

고려시대 창주에 방어사를 배치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몽골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1231년(고종 18) 몽골군이 창주성과 성읍 지역을 침입해 들어왔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 이성만호부(泥城萬戶府)를 설립하면서 여러 진을 설치했는데, 창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1402년(태종 2) 이성을 창주에 통합시켜 창주군으로 승격되었다. 세종조에는 창주진이 설치되었고 창주병마절제사에게 진보를 지휘하도록 조치했다. 1479년(성종 10년) 창주진에 성을 쌓았다. 성의 높이는 7자(약 2m), 둘레가 3,616자(약 1.1㎞)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성종실록』 10년 9월 29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건설부국립지리원, 『한국지명요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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