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문(曺錫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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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3년(태종13)∼1477년(성종8) = 65세]. 초명(初名)은 조석문(曺石門), 또는 조석문(曺碩門). 조선 초기 세종∼성종 때의 문신. 자는 순보(順甫)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장단(長湍)이다. 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조항(曺沆)이고, 어머니 여흥민씨(驪興閔氏)는 사간원(司諫院)지사(知事)민설(閔渫)의 딸이다.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안숭선(安崇善)의 사위이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22년(세종4) 나이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나이 33세가 되던 1434년(세종16)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2등 방안(榜眼)으로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세자좌정자(世子左正字)에 보임되고, 이어 집현전(集賢殿)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으며, 봉상시(奉常寺)주부(主簿)로 옮겼다. 1436년(세종18)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형조 좌랑(佐郞) · 종부시(宗簿寺) 판관(判官)이 되었다.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으로 옮겼다가 이조 정랑(正郞) ·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1446년(세종28)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자, 산릉(山陵)의 일을 맡아서 감독하고, 이어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때 정인지(鄭麟趾)가 남쪽 지방을 순찰하고 전제(田制)를 바로잡았는데, 그가 조석문(曺錫文)이 재능이 있다고 추천하여 막료(幕僚)로 삼았다.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자, 다시 예조 정랑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고향 장단(長湍)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며 지냈다. 1451년(문종1) 정인지가 그의 능력을 애석하게 여겨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에게 소개하여, 안산군사(安山郡事)에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1) 수양대군 일파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이어 수양대군이 섭정(攝政)하면서 그를 크게 기용(起用)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홍주목사(洪州牧使)에 결원(缺員)이 생기자 우선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 수양대군은 그를 특별히 대호군(大護軍)형조 지사(知事)로 승진시켰는데, 이때부터 조석문은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활동하였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그 공훈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훈(策勳)되었다.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 ·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서 1457년(세조3)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의 직함을 띠었다. 1459년(세조5) 명(明)나라에서 ‘조선에서 사사로이 야인(野人)에게 관직을 제수한다’고 하여 사신(使臣)을 보내어 질책하였다. 이에 세조가 그를 주문사(奏聞使)로 임명하여, 명나라에 가서 변명하게 하였는데, 그는 명나라에 가서 황제와 예부(禮部)를 설득하여 명나라의 오해를 풀었다. 그 공으로 호조 참판(參判)창녕군(昌寧君)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호조 판서(判書)로 승진하였다.

1464년(세조10) 부친상을 당하였고, 상례가 끝나자 1466년(세조12)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호조 판서를 겸임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호조의 일을 20여 년 동안 겸하여 맡아서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조석문의 업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1467년(세조13) 길주(吉州) 사람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서 출정하였다. 그는 나이 어린 병마도총사(兵馬都摠使)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을 대신하여 직접 작전 계획을 세워서 관군을 총지휘하였는데, 함흥(咸興)에만 주둔하고 북쪽으로 진군하지 않는다고 남이(南怡) · 강순(康純) 등 여러 장수들이 불평하였다. 그러나 조석문은 함흥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이시애 반란>을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훈되고,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뒤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468년(세조14) 세조의 명령을 받고 노사신(盧思愼)과 함께 <이시애 반란>을 토벌한 사실을 정리하여 『북정록(北征錄)』을 편찬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 <남이 · 강순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그는 이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으로 익대 공신(翼戴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는데,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이 있다고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훈되었다. 1476년(성종7)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면직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77년(성종8) 중추부(中樞府)영사(領事)에 임명되었으나, 설사병인 이질 증세가 갈수록 악화되자, 그는 말하기를, “나이와 벼슬이 이미 지극한 데에 이르렀는데, 죽는다고 한들 다시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1477년(성종8) 8월 5일에 병세가 위독해져서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향년이 65세였다.

이시애 반란의 평정

1467년(세조13) 길주 사람 이시애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함께 중앙 정부에 대한 함길도 토호들의 반감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함길도절도사(咸吉道節度使)박호문(朴好文)을 죽이고, 그 지역 토호들에게 몰래 파발문을 보내어 영흥(永興) 이북의 목사(牧使)와 군수(郡守)를 모두 죽였다.

세조가 27세의 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 임영대군의 아들)을 병마도총사로 삼고 조석문을 병마부총사로 삼아, 각 도(道)에서 차출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유소(魚有沼) · 강순 · 박중선(朴仲善) · 남이 등의 장수들에게 그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3만 명의 대군(大軍)이 함흥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니, 이시애가 한밤중에 철기(鐵騎)로써 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를 물리치니, 반란군이 패하여 이성(利城)으로 돌아갔다. 반란군이 용맹스런 장수를 보내어 다른 길로 함흥을 습격하였으나, 요새의 관군에게 길이 막혀서 진격해 오지 못했다. 또 관군이 북을 울리면서 함관령(函關嶺)을 넘으니 반란군이 그 위세를 보고 놀라서 달아나므로, 관군이 뒤쫓아 가서 이성에 이르러 거산역(居山驛)에서 접전하였다. 관군이 성위로 기어 올라간 후 사면(四面)에서 반란군을 공격하니, 이시애가 이성에서 탈출하여 길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휘하의 사람들이 이시애를 결박하여 끌고 왔으므로, 서울로 압송하고 그 여당(餘黨)을 모조리 소탕하였다.

그때 병마부총사조석문이 장병들의 부서(部署)를 나누고 군량(軍糧)을 징발하여 작전 계획을 세우고 지휘하였다. 경험이 없는 병마도총사귀성군이준은 그의 지휘에 감탄하고 그 계획에 따랐다. 관군이 개선해 돌아오자, 세조는 무송군(茂松君)윤자운(尹子雲)에게 명하여 종친 · 재상들과 함께 교외(郊外)에 나가서 환영하게 하고, 장병들에게는 술을 내려 위로하도록 하였다. 세조가 장수들을 대내(大內)로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친히 잔을 들어 조석문 등을 위로하였다. 이로써 세조는 김종서(金宗瑞)와 이징옥(李澄玉)을 지지하던 함길도 토착 세력의 저항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성품과 일화

조석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밝았고 지혜로웠다. 청렴으로써 자기 몸을 다스리고 위엄으로써 아랫사람을 단속하였기 때문에 자제들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먼저 『소학(小學)』을 읽게 하고 말하기를, “정말로 이 책의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종신토록 사업을 하더라도 여유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는 3조(朝)의 원훈(元勳)으로서 벼슬이 정승 자리에 이르렀으나, 전원(田園)을 늘리거나 제택(第宅)을 꾸미지 않았다. 집 근처 빈 땅에 작은 모정(茅亭)을 세우고 좌우(左右)에 도서(圖書)를 쌓아놓은 채로 학문을 연구하며, 그 속에서 시가(詩歌)를 읊으면서 포의한사(布衣寒士)처럼 지냈다.

그는 20여년 동안 호조를 겸직하여 총괄하였는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계획을 수립하고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였으므로, 태창(太倉)의 곡식이 가득차서 넘치기에 이르렀다. 세조는 “호조의 계차(啓箚: 보고서)에서 다만 조석문의 이름만 있으면, 내가 다시 살펴보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칭찬하고 신임하였다. 그는 오래도록 승정원의 승지를 맡았기 때문에, 세조에게 건의한 의견들이 모두 임금의 뜻에 맞았다. 그리하여 세조는 자주 그를 와내(臥內)에 불러들여 긴밀한 대정(大政)을 함께 의논하였다. 그러나 『성종실록(成宗實錄)』조석문의 졸기(卒記)에서는 사관이 그에 대하여 “그는 아첨을 잘하여 남의 마음에 들고, 임금의 뜻을 잘 맞추어서 출세하였다.”라고 비난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부(長湍府)의 동쪽에 있는데, 양성군(陽城君)이승소(李承召)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삼탄집(三灘集)』 권13) 첫째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의정부 좌참찬문숙공(文肅公)안숭선(安崇善)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둘째 부인 평강채씨(平康蔡氏)는 좌군 섭사정(攝司正)채하정(蔡河楨)의 딸인데, 1남을 낳았고, 그가 바로 외아들 조헌(曺憲)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삼탄집(三灘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견한잡록(遣閑雜錄)』
  • 『해동잡록(海東雜錄)』
  • 『기재잡기(寄齋雜記)』
  • 『동문선(東文選)』
  • 『동각잡기(東閣雜記)』
  • 『순암집(順菴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필원잡기(筆苑雜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