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반장(殿庭半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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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궐 행사에서 왕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는 두 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의장 제도.

개설

궁궐에서 진행되는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이 동원된다. 전정반장은 궁궐 마당에 배치되는 세 등급의 의장 중 두 번째 등급의 의장이었다. 조선에서는 왕의 의장만 등급 구분이 있었기 때문에 전정의 반장은 왕의 의장에만 적용되는 개념이었다.

조선에서는 왕이 외부로 행차할 때 갖추게 되는 노부(鹵簿)의 의장물 구성을, 궁궐 마당[殿庭]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배치되는 의장의 구성과 동일하도록 하였다. 전정반장에 적용되는 의장물의 종류와 규모는 행차 의장인 노부의 법가(法駕)와 동일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이 의례 정비 과정에서 주로 참조했던 중국의 당과 송의 의장 제도는 행차할 때 사용되는 노부와 궁궐에 배치되는 의장이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의 경우도 노부와 궁궐 마당의 의장은 그 구성물의 종류와 규모가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행차할 때 갖추는 노부와 궁궐 마당 의장의 의장물 구성을 동일하게 운영하였다.

조선에서도 처음에는 궁궐 마당의 의장 배치가 노부의 의장물 구성과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초까지 조선의 궁궐 의장은 고려 때와 같이 정전(正殿)의 상하 월대(月臺)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고려의 방식을 계승했으므로, 그 의장물의 편성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의 궁궐 의장은 1428년경(세종 10)에는 마당으로 확대되었고, 동쪽과 서쪽, 남쪽에 배치되어 행사 공간을 에워싸듯이 배치되었다. 1433년경(세종 15) 의장 제도를 재검토하면서 동쪽과 서쪽에만 의장을 두되, 세 줄로 집중 배치하도록 수정하였다. 이는 의장물을 집중 배치하여 왕에 대한 상징성이 극대화하도록 고려한 것이었다. 한편, 1431년(세종 13)에는 궁궐 마당에 노부의 대가(大駕)보다 축소된 의장을 배치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는데(『세종실록』 13년 3월 8일), 아직 노부 법가가 제정된 시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장의 전정의장은 확립되지 않았다. 1428년 이후 각종 전례(典禮)의 절차를 설명한 의주(儀註)가 만들어지지만, 이들 의주에서 사용되는 의장으로 전정반장을 표시한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443년(세종 25) 이후의 검토 사항을 담은 『세종실록』「오례」에서 법가의 규정이 등장하고, 이와 함께 법가의 의장물 구성이 전정의 반장과 동일하다고 명시되어 비로소 전정반장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초와 동지에 시행하는 대조하(大朝賀)에 대장(大仗)이 사용되고, 일상 조회인 조참에 소장(小仗)이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전정반장은 왕이 참석하는 공식 행사에서의 표준 의장이었다.

성종 때 간행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도 『세종실록』「오례」의 노부 규정이 의장물의 구성과 규모는 거의 변화 없이 계승되었다. 전정반장 규정도 두 기록에서 거의 변화가 발견되지 않는데, 다만 국가 제사 때 왕이 관리에게 향(香)과 축문(祝文)을 전해주던 전향(傳香) 의식에 반장을 쓰던 것이 『국조오례의』에서 탈락되었기 때문에 전정반장의 사용 의식이 하나 줄어든 정도의 수정만 이루어졌다.

절차 및 내용

전정반장은 궁궐 마당에서 사용되는 의장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전정의장이 사용되는 일반적인 방식과 동일하게 운영되었다.

전정반장은 조선시대 궁궐에서 진행되는 각종의 의식에서 가장 사용 빈도가 높은 의장이었다. 정초와 동지, 왕 탄신일에 시행하는 조하에서 대장을 배치하고, 5일 단위로 시행되는 조참 조회에서 소장의장이 사용되었다. 이들 경우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의식에서 반장의 의장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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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까지 전정의 의장은 왕의 신분을 상징하는 기능에 집중하였다. 이때 행해진 정전의 상하 월대에 배치하던 의장이 마당까지 확대 배치되는 결정과 의장을 동쪽과 서쪽에 밀집하여 배치하도록 한 것은 그러한 목적에 부합되는 조처였다. 그러나 세조대를 거치면서 의장에는 의례 공간을 표시하는 기능이 강조되고, 이와 함께 의장이 배치되는 순서와 방식에서도 변화가 수반되었다.

『세종실록』「오례」에서는 왕이 타는 여연(輿輦)과 어마(御馬)를 의장과 분리하여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여연과 어마는 그 동원되는 종류와 규모에 따라 신분을 표시하는 기능이 있었지만, 이들 탑승기구를 의장의 일부로 간주하여 여타의 상징 의장과 통합하여 파악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탑승기구와 여타의 의장은 서로 다른 시간에 분리되어 배치되었다.

『국조오례의』에서는 북으로 초엄(初嚴)을 알려 의례의 시간이 선언되면, 이어서 의장을 배치하여 의례의 공간 범위를 확정하도록 하였다. 의장은 동쪽과 서쪽뿐 아니라 남쪽까지 전체 공간을 에워싸도록 배치되었다. 세종대에는 갑사(甲士)가 행사장을 둘러싸도록 하였는데, 『국조오례의』에서는 시위 병력을 의장보다 안쪽에 배치시켰다. 아울러 여연과 어마를 의장 배치와 동시에 행사장 마당에 배치시켜 의장의 일부로 통합하였다.

전정반장은 의장기 중 육정기(六丁旗)가 없다는 점에서 대장과 차이가 난다. 그러나 다른 의물은 개수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소장보다는 대장에 근접한 의장물 구성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통전(通典)』
  • 『문헌통고(文獻通考)』
  • 『대명집례(大明集禮)』
  • 『제사직장(諸司職掌)』
  •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 김지영, 「조선시대 典禮書를 통해 본 御駕行列의 변화」, 『한국학보』3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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