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장(障子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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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에 부가되는 창호의 일종인 장지 만들기를 담당했던 장인.

개설

장지는 ‘障子’, ‘莊子’ 등으로 표기되는데 여러 문헌에서 ‘障子’가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한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섬용지(贍用志)」에서는 장지[粧子]에 대해 “동방의 제도에 방과 대청의 경계에 격자 살을 성글게 짠 문합(門閤)을 설치한다. 문짝이 네 개인 것도 있고 문짝이 여섯 개인 것도 있다. 방의 넓이에 따라 문짝 수를 결정하며, 안팎 모두 전후지를 바르는데, 세상에서 이것을 장지라 부른다.”고 하였다.

장지는 방과 방 사이, 방과 대청 사이에 사용하는 미닫이 형식의 문을 말한다. 특히 궁궐의 침전과 같이 여러 개의 방이 연접해 있는 경우에는 많은 수의 장지가 사용되었다. 장지는 창호 양쪽 면에 모두 창호지를 발라 빛이 투과되지 못하도록 만든 맹장지[盲障子]와 한쪽 면에만 창호지를 발라 빛이 투과할 수 있도록 만든 일반 장지로 구분된다. 현대에는 일반 장지를 명장지[明障子]라고 부르고 있다. 즉 명장지는 한쪽 면의 살대가 외부에 노출되도록 만든 것인 반면 맹장지는 살대가 전혀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맹장지가 명장지보다 외부의 빛과 소리를 차단하는 효과가 뛰어나고 보온에 효과적이어서 외기에 면하는 곳에 많이 사용한다.

변천

조선시대를 통틀어 장지장[障子匠]과 같이 특별히 정해진 창호를 만드는 장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후기 영건과 관련된 의궤 기록을 참고해보면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와 같이 창호 제작을 담당했던 세살목수[細箭木手]가 따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창호 제작은 소목장(小木匠)이 담당했다. 소목장은 창호 외에도 소반, 가구 등 사용자의 손이 직접 닿는 기물을 만드는 장인이다. 창호와 관련된 전문 장인이 등장하는 것은 20세기 들어서부터이다. 1901년 편찬된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를 비롯해 이후의 영건 관련 의궤에 창호장(窓戶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장지장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에는 단 한 차례 등장한다. 궁궐 안에서 신부(信符)를 차고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기술하면서 ‘장지장 10명’이 등장한다(『세종실록』 5년 2월 10일). 다른 직종의 장인들과 더불어 기술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지장의 성격에 대해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부를 주어 궁궐을 드나들 수 있게 한 것으로 짐작하건대 이들 장지장은 새롭게 장지를 만드는 것보다 파손된 장지를 수리하거나, 장지에 창호지를 다시 바르는 일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
  •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
  • 김도경, 『지혜로 지은 집 한국건축』, 현암사, 2011.
  • 서유구 저, 안대회 역, 『산수간에 집을 짓고』, 돌베개, 2005.
  •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동녘,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