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李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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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9년(중종 4)∼1573년(선조 6) = 65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예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택지(澤之)이고, 호는 우당(雨堂)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병조 참판에 추증된 이교(李嶠)이고,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절도사(節度使)하성군(夏城君)성수재(成秀才)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병조 참판을 지낸 이륙(李陸)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정(正)을 지낸 이지(李墀)이다.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으로 이원(李原)의 현손이기도 하다.

중종~인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1538년(중종 33)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승문원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1541년(중종 36)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는데, 명(明)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잘 썼으므로, 승문원 검교(檢敎)를 겸임하였다. 이후 공조 좌랑(佐郞)과 예조 좌랑, 병조 좌랑을 역임하고, 1543년(중종 38)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544년(중종 39)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역임하였다.(『중종실록』 39년 2월 22일) 그해 겨울, 고부청시사(告訃請諡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545년(인종 1)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인종실록』 1년 5월 12일),(『인종실록』 1년 5월 12일)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47년(명종 2) 내섬시(內贍寺)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명종실록』 2년 1월 22일) 그해 여름, 육진(六鎭)에 흉년이 들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온성부사(穩城府使)에 임명되어 피해 지역을 위무(慰撫)하였는데, 그 곳에서 선정을 베풀었다.(『명종실록』 2년 6월 20일) 1549년(명종 4) 병으로 체직(遞職)된 후, 1550년(명종 5)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5년 4월 29일) 1553년(명종 8)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54년(명종 9)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명종실록』 8년 8월 4일),(『명종실록』 9년 2월 15일) 1555년(명종 10) 승정원 좌부승지(左部承旨)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가,(『명종실록』 10년 7월 14일),(『명종실록』 10년 8월 16일) 그해 가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면서 함경남도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10년 10월 19일) 1558년(명종 13)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고,(『명종실록』 13년 2월 27일) 1559년(명종 14) 도승지(都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 14년 9월 25일) 이어 1562년(명종 17)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전임되었다.(『명종실록』 17년 8월 7일) 1563년(명종 18)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가,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명종실록』 18년 9월 6일),(『명종실록』 18년 10월 4일) 1565년(명종 20)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으며, 이어 형조 참판을 거쳐 다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명종실록』 20년 1월 11일),(『명종실록』 20년 5월 29일),(『명종실록』 20년 11월 5일)

1573년(선조 6) 예조 참판으로 재직하였는데, 특진관으로서 경연(經筵)에 참석하기 위하여 경연청(經筵廳)에 도착하였으나, 코피가 몹시 나서 참석할 수 없었다.(『선조실록』 6년 8월 16일) 결국 병으로 면직되었는데, 그해 9월 29일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온화하고 순결하여, 관직을 맡고 있을 때나, 집에서도 청렴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높은 벼슬에 이르렀으나 남과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마치 한사(寒士)처럼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다. 집사람들이 찾아오는 손님이 없다고 조롱하기라도 하면, 그는 “손님이 없는 것이 나의 참다운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시와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 그의 선조는 고려 말에 서법(書法)으로 일가를 이룬 문하시중(門下侍中)행촌(杏村)이암(李嵒)이다. 이암의 후손 가운데는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많았는데, 이택도 필력이 힘차고 뛰어나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고 전한다.

이택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인 자문(咨文)을 잘 써서 줄곧 승문원의 관직을 겸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유진동(柳辰仝)은 명나라 예부(禮部)의 관원이 조선에서 보낸 자문의 글씨가 잘 쓰인 것을 보고 탄복한 나머지 조선 사신을 후대하였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명종은 정랑으로서 자문서사관(咨文書寫官)을 겸임하고 있던 이택 등 4명과 표문제술관(表文製述官)에게 숙마(熟馬) 1필씩을 하사하였다. 이뿐 아니라 그는 필력을 인정받아 부묘(祔廟) 때 신주(神主)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명종실록』 2년 1월 22일) 작품으로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예조참판임추묘비(禮曹參判任樞墓碑)」가 있다.

이택은 활을 잘 쏘고, 말 타기도 즐겼는데, 무인(武人)들도 감히 그 실력을 다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문무(文武)를 겸비한 재능을 갖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능력덕분에 그는 서북(西北)의 중요한 진(鎭)을 포함하여 6곳의 관찰사(觀察使)를 모두 일곱 번 지냈다. 관찰사로서 그는 군졸을 무휼하고 백성을 침탈하지 않았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명종실록』 20년 11월 9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갈마리(葛麻里) 선영(先塋) 옆(현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島村洞))에 있고, 이이(李珥)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주부(主簿)박훈(朴薰)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두었다.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인 광복수(廣福守) 이존영(李存英)의 딸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이경(李磬)은 일찍 죽었고, 차남 이연(李碾)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판관(判官)을 지냈으며, 3남 이제(李磾)는 찰방(察訪)을 지냈고, 4남 이지(李砥)는 진사(進士)를 지냈다. 장녀는 봉사(奉事)김가빈(金可賓)의 처가 되었으며, 차녀는 유몽표(柳夢彪)의 처가 되었고, 3녀는 윤희굉(尹希宏)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미암집(眉巖集)』
  • 『역대요람(歷代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율곡전서(栗谷全書)』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