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달(李惟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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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9년(선조 12)∼1637년(인조 15) = 59세].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집의(執義)·예조 정랑(禮曹正郞)·밀양 부사(密陽府使)이다. 자(字)는 겸선(兼善)이고, 호(號)는 백봉(白峯)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이찬(李璨)이고,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사의(司議)박효원(朴效元)의 딸이다. 성종의 서출 제 3왕자 완원군(完原君)이수(李燧)의 5세손이다. 동주(東洲)이민구(李敏求)와 동방(同榜)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광해군 때 승정원 주서(注書)를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다. 인조 때 예조(禮曹)·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외관으로 경기 도사(京畿都事)·광주 목사(光州牧使)·밀양 부사(密陽府使) 등을 지냈다. 밀양 부사로 있을 때 점필재(佔畢齎)김종직(金宗直)의 묘소를 축조하고 그 사당을 세웠다. 계모(繼母)에게 효성을 다한 효자로 이름 높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6년(선조 39)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 6년이 지난 1612년(광해군 4)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고,[비문] 1613년(광해군 5) 시강원 설서(設書)를 겸임하였으며, 1614년(광해군 6)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5년 12월 21일),(『광해군일기』 6년 8월 24일)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뜻을 거스르면서, 전라도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좌천되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으며,[비문] 1615년(광해군 7) 분(分) 병조 좌랑(兵曹左郞)이 되었다가, 1621년(광해군 13) 병조 좌랑(兵曹左郞)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13년 7월 2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각 지방의 민심을 달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적발하기 위하여 선유 어사(宣諭御史)를 파견하였는데, 이유달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선유 어사로 나갔다. 이때 선유 어사이유달(李惟達)은 경상도 병사(兵使)이응해(李應獬)가 감추어 둔 쌀 353석(石)과 포목 4동(同)을 찾아내 조정에 보고하였다.(『인조실록』 1년 6월 27일),[『승정원일기』인조 1년 6월 27일] 그 뒤로 조정에서 벼슬살이한 13년 동안 예조(禮曹)·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성균관 사유(師儒)로서는 직강(直講)·사예(司藝)를, 각사(各司)에서는 제용감(濟用監)·예빈시(禮賓寺)·군자감(軍資監)·군기시(軍器寺)·종부시(宗簿寺)·사도시(司䆃寺)의 정(正)을, 세자시강원에서는 사서(司書)·문학(文學)·필선(弼善)을,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를, 겸관(兼官)으로는 지제교(知製敎)·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외관직(外官職)으로는 경기 도사(京畿都事)·광주 목사(光州牧使)·밀양 부사(密陽府使) 등을 지냈는데, 이것이 이유달의 비문에 기록된 인조 때의 관력(官歷)이다.[비문]

그러나 『인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이유달의 관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인조반정> 직후, 경상도와 전라도에 선유 어사(宣諭御史)로 나갔다가,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경기 도사(都事)로 나갔다가,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면서 서호(西湖: 마포)로 가서 쌀과 포목을 수습하였다. 1625년(인조 3) 세자시강원 사서(司書)가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인조실록』 3년 3월 11일) 1626년(인조 4) 전라도 광산 현감(光山縣監)으로 나갔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연임하였다. 이때 관에서 패랭이[平涼子]와 말발굽[馬鐵]등의 물건을 많이 제조하여 시장에서 곡식으로 바꾸어 오래된 포흠(逋欠)을 메웠으므로, 비방하는 말이 떠돌았으나, 고을 백성들은 그가 벼슬을 그만둘까봐 두려워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3월 19일] 1628년(인조 6) 정태화(鄭太和)·이일상(李一相) 등과 함께 승문원(承文院)의 신래(新來)를 선발하는데 뽑혔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12월 13일] 1629년(인조 7) 승정원 가(假) 주서(注書)에 의망(擬望)되었으나, 낙점(落點)을 받지 못하자, 광산 현감(光山縣監)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1월 27일]

1630년(인조 8)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가,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서,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10월 21일] 1631년(인조 9)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이때 사헌부 대사헌은 정경세(鄭經世)이었고, 사간원 대사간은 이민구(李敏求)였다. 이후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고,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9년 10월 27일] 1632년(인조 10)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서,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인조실록』 10년 4월 21일) 1634년(인조 12)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는데, 점필재(佔畢齎)김종직(金宗直)의 묘소(墓所)를 축조하고, 위량못[位良池]의 양야제(陽也堤)를 수축하였다. 1636년(인조 14) 형조 정랑(刑曹正郞)이 되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당시 가족들은 전란을 피하여 산중으로 피난을 갔는데 이때 늙은 계모(繼母)를 잃어버렸다. 1637년(인조 15)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임명되었는데,[『승정원일기』인조 15년 2월 19일] 이유달은 계모를 찾기 위하여 말미를 받아 동분서주하였다.

이유달의 사망 시기에 대하여 동주(東洲)이민구(李敏求: 이수광의 아들)는 그가 지은 이유달의 「묘갈명(墓碣銘)」에서 이유달이 1635년(인조 13)에 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 57세였다고 하였다.[비문] 그러나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조정에서 1637년(인조 15) 8월 6일 이유달을 문신(文臣)으로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도록 하였는데, 예조에서 그해 8월 11일 임금에게 이유달이 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경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아뢰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이유달은 1637년(인조 15) 8월 6일~11일 사이에 돌아간 것이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향년이 59세였다. 이민구(李敏求)는 이유달과 과거에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이었다. 또한 이유달이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을 때, 이민구(李敏求)는 대사간(大司諫)이었는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임금에게 직언(直言)하는 언관(言官)의 역할을 하기도하였다. 그러나 관찬 사료인 『승정원일기』가 이민구가 지은 이유달의 「묘갈명(墓碣銘)」보다 신빙성이 있기 때문에 이민구가 비록 이유달의 아들 이담(李香+覃)이 가지고 온 행록(行錄)에 의하여 비문을 지었으나, 돌아간 연대를 잘못 쓴 것으로 생각된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렴하고 결백하며, 행동이 근신하고 근면하였다.[비문]

이유달(李惟達)은 지극히 착실한 성품에다가 단정하고 성실하였는데, 누구나 그와 친하게 사귀기는 쉬웠으나 그와 가깝게 지내기는 어려웠다. 평상시에는 말소리가 나지막하고 얼굴빛이 온화하여,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의 체면조차 지키지 못할 것처럼 보였으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확고한 신념을 지키고 정도(正道)를 잃지 않았다. 친구들과 노는 자리에서도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믿음직하였으며, 자신을 우아하게 꾸며서 남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지도 않았다.[비문] 제삿날이 되면, 직접 제물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하여 몸소 제사 음식을 자르고 삶았는데, 제사 음식을 만드는 일을 여종에게 맡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물이 아무리 많아도 제사 음식을 정갈하게 하였다. 관직을 맡아서는 청렴결백하고 근신하며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외직의 주군(州郡)에 수령관으로 있을 때에는 번번이 공적을 쌓았으므로 여러 번 임금의 표창을 받았는데, 임지를 떠날 때에는 백성들이 그 덕(德)을 사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비문]

집안에서는 계모 황씨(黃氏)를 봉양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머리가 희도록 하루같이 정성껏 모시면서 맛있는 음식을 구해다가 바쳤고, 미리 어머니의 뜻을 헤아려 기쁘게 해드렸으므로, 계모가 일생 동안 편안하게 살았다. 이유달은 <병자호란> 때 피난길에 계모 황씨를 잃어버렸는데, 동분서주하며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어머니 황씨를 찾아 집으로 모셨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이유달은 결국 병을 얻어 돌아갔다. 이유달은 어려서부터 6촌형 이유종(李惟宗)과 같이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이유달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형 이유종은 과거에 실패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607년(선조 40) 6촌형 이유종의 첫째부인 노씨(盧氏)가 갑자기 돌아가고 어린 딸마저 죽자 그가 몹시 방황하였는데, 이유달이 형 이유종을 설득하여 집으로 모시고 와서 10년 동안 한집에 함께 살며, 의복을 같이 나누어 입고 음식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고대일록』 4권] 그의 보살핌으로 마침내 형 이유종(李惟宗)이 마음을 잡고 둘째부인 임씨(任氏)와 혼인하였으며, 음서(蔭敍)로 벼슬길에 나가 고성 현감(固城縣監)·문천 군수(文川郡守)를 지냈다. 그는 동생 이유달이 죽은 후인 1643년(인조 21) 정평 부사(定平府使)가 되어,[『승정원일기』인조 21년 5월 21일] 6촌 동생 이유달의 집안사람들을 돌보아주었다.

1634년(인조 12)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간 이유달은 유학의 종주(宗主)인 점필재(佔畢齎)김종직(金宗直)의 묘소(墓所)를 참배하였는데, 묘소가 석물(石物)도 없이 허물어져서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므로, 밀양 관청에서 그 후손에게 재화(財貨)를 주어 묘역을 새로 축조하는 밑천으로 삼도록 하였다. 1635년(인조 13) 밀양의 유생(儒生)들이 그 재화를 넘겨받아 묘역의 공사를 시작하고 묘소에 석물을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부사이유달이 밀양을 떠난 지 14년 만에 김종직의 묘소에 묘갈(墓碣)과 석상(石床)과 망주석(望柱石)이 제대로 갖추어지면서 묘역이 완성되었다. 남인의 영수 미수(眉叟)허목(許穆)이 묘갈문을 지어서, 밀양 부사이유달이 유학의 종주(宗主)인 김종직의 묘소를 새로 축조한 시기와 묘역 공사의 전말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노론의 영수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밀양의 김종직 묘소를 찾았다가, 허목이 지은 묘갈문을 없애버리고, 그 대신에 그의 제자 한수재(寒水齎)권상하(權尙夏)에게 김종직의 묘갈문을 지어 세우도록 하였다.

또한 이유달은 밀양 부사로 재임할 때, 예림사(禮林祠)를 옮겨서 새로 건조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하였다. 예림사는 김종직을 제향하기 위하여 1577년(선조10)에 밀양에 세운 사당인데, 1645년(인조 23) 예림서원(禮林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연려실기술』 별집 4권] 신도비(神道碑)는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이 지은 것인데, 1634년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의 후지(後識)를 받아 김종직의 묘소 앞에 세웠다.

묘소와 후손

동주(東洲)이민구(李敏求: 이성구 동생)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진천송씨(鎭川宋氏)는 송징(宋澄)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이담(李香+覃)은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장녀는 관찰사(觀察使)윤명은(尹鳴殷)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사인(士人) 김경주(金慶胄)에게 시집갔다.[비문]

1634년(인조 12) 밀양 부사(密陽府使)이유달(李惟達)이 밀양의 위량못[位良池] 양야제(陽也堤)를 수축하였는데,지금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완재정(宛在亭)이 있는 저수지 위량지(位良池: 위량못) 제방(堤防)이다. 원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지금은 수리제방을 만든 옛터와 그 주변에 이팝나무 군락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밀양 8경(景)>의 하나이다. 밀양의 위량못 양야제(陽也堤)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1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대일록(孤臺日錄)』
  • 『기언(記言)』
  • 『동계집(桐溪集)』
  • 『여헌집(旅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