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李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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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68년(공민왕 17)∼1429년(세종 11) = 62세]. 고려 말 우왕(禑王)~조선세종(世宗) 때의 문신.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냈다. 자는 차산(次山)이고, 호는 용헌(容軒)이다. 봉작(封爵)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며, 시호는 양헌(襄憲)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이강(李岡)이며, 어머니 곽씨(郭氏)는 개성부판사(開城府判使)곽연준(郭延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 서법(書法)으로 일가를 이룬 문하시중(門下侍中)이암(李嵒)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철성군(鐵城君)이우(李瑀)이다. 권근(權近)의 처남이기도 하다.

태조~태종 시대 활동

1382년(고려 우왕 8)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1385년(고려 우왕 11)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8세였다. 1388년(고려 우왕 14) 사복시(司僕寺) 승(丞)에 보임되었고, 공조 좌랑(佐郞)과 예조 좌랑을 거쳐 병조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1396년(태조 5) 사헌부 중승(中丞)이 되었다.(『태조실록』 5년 5월 18일)

1400년(정종 2)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정종실록』 2년 2월 4일) 왕명을 출납하는 것이 상세하고 명확하며 성실하였으므로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정종실록』 2년 11월 11일)

이때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이원은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녹훈(錄勳)되고, 철성군에 봉해졌다.(『태종실록』 1년 1월 15일) 그해 6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범야(犯夜 : 야간 통행금지 시간인 초경과 오경 사이에 함부로 다니는 것)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태종실록』 1년 9월 21일) 그러나 이듬해인 1402년(태종 2)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左右道都觀察黜陟使)로 복직되었다.(『태종실록』 2년 1월 20일) 1403년(태종 3) 승추부(承樞府) 제학(提學)으로서 사은사(謝恩使) 부사(副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평양부윤(平壤府尹)에 임명된 후,(『태종실록』 3년 4월 4일),(『태종실록』 3년 4월 21일),(『태종실록』 3년 9월 9일),(『태종실록』 3년 12월 11일) 사무가 바쁘고 다스리기 어렵다는 평양 부를 잘 다스려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때 대동관(大同館)을 수선하였는데 백성들을 번거롭게 할 것을 염려하여 직접 하리(下吏)를 거느리고 재목과 기와를 나르자, 백성들이 즐겁게 일에 참여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듬해에는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를 겸하였다.

1406년(태종 6)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거쳐 중군 총제(中軍摠制)의정부 참지사(參知事)가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태종실록』 6년 2월 18일) 그해 12월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태종실록』 6년 12월 8일) 1408년(태종 8)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며,(『태종실록』 8년 7월 13일) 이듬해인 1409년(태종 9) 강원도동북면순찰사(東北面巡察使)로 전임되었다.(『태종실록』 9년 10월 12일) 1411년(태종 11)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태종실록』 11년 5월 19일) 그해 8월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태종실록』 11년 8월 26일) 1413년(태종 13) 영길도(永吉道)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에 임명되었다.(『태종실록』 13년 7월 27일) 이원은 상중이라는 것을 알리며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기복(起復)의 명을 받고 부임하여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하였다.(『태종실록』 13년 8월 1일) 1415년(태종 15)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훈호(勳號)를 받은 후 예조 판서(判書)로 승진되었다가,(『태종실록』 15년 6월 19일) 사헌부 대사헌에 세 번째로 임명되었다.[『예조실록』 15년 12월 28일 2번째기사] 1416년(태종 16) 한성부판사를 거쳐 의정부 참찬(參贊)이 되었고,(『태종실록』 16년 3월 16일) 이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태종실록』 16년 5월 25일) 1417년(태종 17) 의정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태종실록』 17년 9월 7일) 이듬해 6월 이조 판서를 거쳐서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태종실록』 18년 6월 2일),(『태조실록』 18년 6월 5일)

세종 시대 활동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우의정으로서 경연청(經筵廳) 영사(領事)를 겸임하였고, 1419년(세종 1)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세종실록』 1년 1월 13일) 이듬해에는 집현전(集賢殿) 영전사(領殿事)를 겸임하였다. 1421년(세종 3)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세종실록』 3년 12월 7일) 1422년(세종 4) 1월 도성 수축 도감(都城修築都監)의 도제조(都提調)가 된 그는 우의정정탁(鄭擢)과 함께 8도의 장정 32만여 명을 징발하여 토성으로 만들어진 도성의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작업을 하였다.(『세종실록』 4년 1월 14일)

1425년(세종 7)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세종실록』 7년 윤7월 16일) 이듬해 노비 증여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職牒)을 박탈당하고 전라도 여산(礪山)으로 귀양 가서 병사하였다.(『세종실록』 8년 3월 15일),(『세종실록』 8년 3월 17일) 1456년(세조 2) 관작이 회복되었다.(『세조실록』 2년 7월 23일)

문집으로는 『용헌집(容軒集)』과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이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생김새는 키가 크고 훤칠하였으며, 수염이 길고 누르스름하였다. 성품은 충직하고 도량이 넓은데다가 바른 학문을 더하였으므로, 정사를 조처하는 것이 대단히 볼만하였다. 평생 남과 말할 때에 속이고 꾸민 적이 없고, 또 모가 나서 스스로 남과 다른 체하지 않았다. 그러나 큰일에 임하여 결단할 일이 있으면 확고하여 산악(山岳)처럼 우뚝하게 동요하지 않았다. 전주(銓注)를 맡은 10여 년 동안에 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선발하되 사심으로 관직을 주거나 빼앗지 않았으므로 원망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1419년(세종 1)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자태가 대단히 눈에 띄었으므로, 영락제(永樂帝)가 특이하게 여겨 황염 재상(黃髥宰相)이라고 부르며 후에 사신으로 꼭 다시 오라고 하였다.

그는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어머니 곽씨 부인이 늘 어린 그를 안고 슬피 울며, “하늘이 이씨 집안에 복을 내린다면 이 고아에게 복을 내려 주시겠지” 하였다. 이원의 손위 누이는 권근의 부인이었는데, 누이는 일찍 고아가 된 동생 이원을 가엾게 여겨 자기 소생처럼 어루만지고 권근도 그를 아들처럼 가르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빼어나서 어른다웠으며 성장해서는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학문이 날로 진취하여 글을 지으면 저작(著作)하는 사람의 기풍이 있었다. 또 함께 논의하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권근이 놀라워하며, “우리 장인은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헌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돌마면(乭馬面) 가차곡(加次谷) 율리(栗里)의 언덕에 있고,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는데, 서거정의 외할머니가 이원(李原)의 손위 누이였다. 1790년(정조 14) 경상도 청도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배향되었다가, 1837년(헌종 3) 안동의 명호서원(明湖書院)으로 옮겨 봉안하였다.[『용헌집(容軒集)』]

첫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전리 판서(典理判書)허금(許錦)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이대(李臺)는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를 지냈다. 1녀는 주부(主簿)유방선(柳方善)의 처가 되었고, 2녀는 부정(副正)유급(柳汲)의 처가 되었다.

둘째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봉상대부(奉常大夫) 군기시(軍器寺) 총랑(摠郞)최정지(崔丁智)의 딸로,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이원이 세상을 떠난 후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원과 같은 묘역에 장사지냈다. 자녀는 6남 4녀를 두었는데, 2남 이곡(李谷)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3남 이질(李垤)은 한성소윤(漢城少尹)을 지냈으며, 4남 이비(李埤)는 중추원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5남 이장(李塲)은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는데, 3남 이질과 4남 이비, 그리고 5남 이장은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6남 이증(李增)은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냈고, 7남 이지(李墀)는 대호군(大護軍) 겸 승문원(承文院) 참교(參校)를 지냈는데 이증과 이지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3녀는 첨지(僉知)윤삼산(尹三山)의 처가 되어 6남 3녀를 낳았는데, 3남 윤호(尹壕)의 딸이 성종(成宗)의 왕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4녀는 구례 현감(求禮縣監)이굉식(李宏植)의 처가 되었으며, 5녀는 좌의정권람(權擥)의 처가 되었고, 6녀는 선공감(繕工監) 부정황종형(黃從兄)의 처가 되었다.

이로써 이원은 본인이 좌의정에 올랐을 뿐 아니라 사위인 권람이 좌의정이 되면서 옹서(翁婿)가 정승이 되었다. 또한 외손자 윤호가 국구(國舅)로서 우의정이 되면서 외손주 역시 정승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용헌집(容軒集)』
  • 『망헌유고(忘軒遺稿)』
  • 『사가집(四佳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언(記言)』
  • 『동문선(東文選)』
  • 『대산집(大山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명재유고(明齋遺稿)』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춘정집(春亭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청파집(靑坡集)』
  • 『호정집(浩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