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李瑛)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01년(연산군 7)∼1558년(명종 13) = 58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자는 자윤(子潤)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과(司果)이양필(李良弼)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현감(縣監)이수유(李守柔)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증(李增)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성균관 생원(生員)이었던 이혁손(李赫孫)이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 그 뒤 14년이 지난 1539년(중종 34)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9세였다.[『방목(榜目)』] 1539년(중종 34) 성균관 권지(權知)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공조 좌랑(佐郞)을 거쳐 병조 좌랑이 되었다. 1546년(명종 1) 명종의 즉위를 도운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이 되었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다. 1547년(명종 2) 가을 형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 1548년(명종 3)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정랑으로 옮겼으며,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1549년(명종 4) 봄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그해 겨울에 돌아와서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50년(명종 5)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이 되었다가 1551년(명종 6)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552년(명종 7) 봄 사섬시(司贍寺) 부정(副正)을 거쳐 얼마 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고 곧이어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으며, 또다시 사재감(司宰監) 정(正)이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군적(軍籍)을 정리하기 위해 이영을 평안도군적경차관(平安道軍籍敬差官)으로 보냈는데, 이영이 평안도의 군적을 자세하게 살피고 빠진 자를 적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1553년(명종 8) 가을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고, 1554년(명종 9) 여름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1555년(명종 10) 봄에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그해 여름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명종실록』 10년 6월 12일) 그리고 겨울에는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었지만, 병으로 인해 체직되었다. 1556년(명종 11) 봄 봉상시(奉常寺) 정에 임명되었다가, 1557년(명종 12) 겨울에 사건으로 인해 파직되었으나, 이듬해인 1558년(명종 13) 다시 서반(西班)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해 가을부터 병이 나서 한 달이 넘게 병석에 누워 있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558년 윤7월 5일에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9월 12일에 인천부(仁川府) 동쪽 다사동(多沙洞)에 장례를 치렀다.

성품과 일화

이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웠으며, 몸가짐이 공경스럽고 근검하였다. 지성과 근면으로 공무를 보았고, 염치로 자신을 가다듬었다. 시비(是非)에 밝았고 일에 임해 과단성이 있었다. 관청에 있을 때에 비록 큰 추위나 무더운 여름일지라도 하루도 병이 있다며 정사를 그만둔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자품(資稟)이 뛰어나고 재예(才藝)가 숙성하였다. 나이 약관(弱冠)이 되지 않아 부모를 여의고, 누님의 슬하에서 자랐다.

대간(臺諫)에 드나든 지 전후 10여 차례였는데,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말하였으므로, 꿋꿋하고 곧다는 평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 모자라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융성한 자리를 차지하였다고 생각하여,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현달한 직책을 맡을 때마다 오랫동안 몸을 움츠리고 조심하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조정에 나가서 벼슬한 지 20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선친이 물려준 낡은 집을 지키고 살았다. 남이 무엇을 자기에게 주었을 경우에는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먼저 의리로 헤아려보고 의롭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성년이 되어서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통한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묘(家廟)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몸소 찬구(饌具)를 나르는 등 부모가 살아있을 때처럼 공경을 다하였다. 또 형이 일찍 죽은 것을 통한한 나머지 형의 딸 세 명을 자신의 소생처럼 보살피고 혼수를 마련하여 모두 혼인을 시켰다. 친척과 벗들이 질병이나 사상(死傷)이 있을 경우에는 허둥지둥 달려가서 병을 치료하며 제때를 놓칠까 염려하였다. 자기가 쓰고 남은 녹봉은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반드시 빈한한 친구들을 도와주었다. 자기의 포부를 10분의 1도 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인천부(仁川府) 동쪽 다사동(多沙洞)에 있는데, 홍섬(洪暹)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금성 노씨(金城盧氏)는 서부(西部) 참봉(參奉)노제(盧濟)의 딸이고, 둘째 부인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부사직(副司直)조계웅(趙季雄)의 딸이다. 금성 노씨는 자녀를 낳지 못하였고, 한양 조씨는 1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이귀남(李貴男)이며, 장녀는 유사(幼士) 여순원(呂順元)에게, 차녀는 충의위(忠義衛)이임원(李臨遠)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인재집(忍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