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李承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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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후 왜란의 뒤처리를 맡아보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어 왔던 명의 무장.

개설

정유재란이 마무리될 무렵 명군 제독(提督)총병관(摠兵官)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한양에 머무르며 전쟁의 뒤처리를 담당했다. 1600년 10월에 명나라로 돌아갔다.

가계

영락 연간 선조가 금의위(錦衣衛)에서 처주위(處州衛)로 옮기면서 지휘동지(指揮同知) 직임을 세습하였다.

활동 사항

1573년(명 만력 1) 동남 연해에서 왜구의 소요가 있자 절강행성총독 직할의 연병(練兵)을 맡아 군령을 엄격히 하니 왜구들이 감히 범하지 못했다. 1581년에 군대의 총무를 맡아 업무를 엄격히 집행하고 군율을 세워 유격(遊擊)으로 승진하였다. 1588년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 14권을 간행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왜구에 대한 방어가 긴요해지자 1595년에 북방의 중요 수비지역이었던 산동의 총병관겸도독첨사(山東總兵官兼都督僉事)에 추천되어 수륙의 관병을 제독하였다. 이승훈은 군령을 매우 엄격히 하여 부하들이 민간에서 함부로 물품을 징발하는 것을 금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명은 2만 4천여 명의 병력을 조선에 머무르게 하였는데 당시 군무의 뒤처리를 담당한 자가 이승훈이었다[『선조실록』 32년 3월 3일 2번째기사]. 그는 군량을 조달할 때 민간에 피해를 끼치지 않아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다(『선조실록』 32년 6월 11일). 1600년 9월 말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선조실록』 33년 9월 27일). 이후 귀주(貴州)를 지키다가 절강으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

1603년 5월 이승훈이 절강의 군무 책임자인 독무도어사(督撫都禦史)윤응원(尹應元)과 함께 해상을 시찰하다가 절강 연해의 섬인 보타산(普陀山)에 올라 ‘도해기사비정(渡海紀事碑亭)’을 세웠는데 지금도 전한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연도구지(蓮都區志)』
  • 杜信孚·杜同書, 『全明分省分縣刻書考』, 線裝書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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