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일(李守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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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4년(명종 9)∼1632년(인조 10) = 79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무신. 북병사(北兵使)와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계순(季純)이고, 호는 은암(隱庵)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이란(李鸞)이고, 어머니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참봉(參奉)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자침(李自琛)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장흥고(長興庫) 주부(主簿)이오(李塢)이다. 우의정이완(李浣)의 아버지이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이시해(李時楷)의 장인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 인(仁)과 지(智)를 아울러 갖춘 명장(名將)으로 유명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3년(선조 16) 별시(別試)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訓練院)의 관직을 거쳐, 1586년(선조 19) 함경도 삼수(三水)의 소농보(小農堡) 권관(權管)이 되었다가, 경상도방어사(慶尙道防禦使)신각(申恪)의 막하(幕下)에 들어갔다. 그때 신각이 종사관(從事官)이수일을 믿고 군무 일체를 맡겼는데, 그가 성실하게 일을 잘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1590년(선조 23) 선전관(宣傳官)으로 승진하였다가, 1591년(선조 24) 경상도장기현감(長鬐縣監)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醴泉)·용궁(龍宮) 등지에서 왜적에게 패배하였다. 1593년(선조 26)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승진하였고, 이어서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발탁되어 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왜적을 격퇴하여,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다.(『선조실록』 26년 7월 24일) 그때 바닷가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경작하여 식량으로 충당하도록 하였으므로, 경상도 백성 가운데 전쟁 중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1만 여 명이나 되었다.

1595년(선조 28)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선조가 기복(起復)하여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임명하였다. 1596년(선조 29) 함경도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었다가 1597년(선조 30)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다.(『선조실록』 29년 8월 27일),(『선조실록』 30년 1월 27일) 도체찰사(都體察使)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선조실록』 32년 2월 20일) 그때 왜군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향하다가, 체찰부(體察府)가 있던 성주를 공격하였는데, 성주목사이수일이 군사를 이끌고 적산(赤山)과 고양(高揚) 사이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1599년(선조 32) 함경북도방어사(咸鏡北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가 곧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이른바 북병사(北兵使)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32년 7월 6일) 그때 건주 여진(建州女眞)의 대추장 누르하치가 조선이 임진왜란을 치르는 동안 여진족(女眞族)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우면서 조선의 북변을 자주 침입하였다. 북병사이수일은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윤승훈(尹承勳)과 함께 오랑캐의 정벌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전후(戰後)에 다시 오랑캐와 불화를 조성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공론이 모아져 그만두었다.

1602년(선조 35) 함경남도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 이른바 남병사(南兵使)가 되어 다시 오랑캐의 정벌을 주장하였는데, 좌의정윤승훈이 남병사이수일의 뜻을 조정에 전하고 대신들에을 적극 설득하니, 선조가 마침내 허락하였다. 남병사이수일은 4천여 명의 기마(騎馬)를 선발하여 군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가서, 멀리 오랑캐 마을을 차례로 습격하여 그 추장 정화려(丁火廬) 등을 무찔러 죽이고 돌아왔다. 이에 누르하치를 따르던 오랑캐 종족의 여러 추장들이 비로소 조선의 명성과 위엄을 두려워하여 서로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이수일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었다. 1601년(선조 34) 남병사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특별히 1년을 유임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1602년(선조 35) 남병사의 부절(符節)을 반납하고 남쪽으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부인 이씨와 막내아들 이완과 즐겁게 지냈다.

그해 12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창원(昌原)에 있던 병영(兵營)을 진주(晉州)로 옮겼다.(『선조실록』 35년 12월 1일)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운 18명을 뽑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록하였는데, 그는 2등으로 책훈되었다. 1656년(선조 38) 길주목사(吉州牧使)에 임명되어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였고,(『선조실록』 38년 8월 7일) 1607년(선조 40)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어 토호(土豪)들이 넓은 토지를 강점하는 폐단을 막았다.(『선조실록』 40년 6월 22일) 또 왕자 한 사람이 수원부사이수일에게 국고의 쌀 1백 포를 빌려달라고 청원하자, 이수일이 정중하게 거절하기를, “지방에 있는 신하가 어찌 사사로이 왕자와 교제하고, 국고의 쌀을 함부로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수일의 말이 옳았으므로, 그 왕자도 감히 불평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다가 수토(水土)의 병으로 사임하였으나, 다시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6일),(『광해군일기』 즉위년 6월 1일) 북병사의 임기를 마친 후 1611년(광해군 3)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에 임명되어, 훈련원(訓練院) 지사와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겸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다시 중추부 지사가 되었고, 1616년(광해군 8)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었다. 1617년(광해군 9) 후금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명(明)나라와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자 조정에서는 ‘이수일이 아니면 오랑캐를 진압할 수 없다’고 하여, 그는 다시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이수일은 세 번이나 북병사를 역임하면서 조선의 북쪽 변경을 위협하는 후금의 오랑캐 세력을 최일선 전방에서 방어하였다.(『광해군일기』 9년 7월 15일)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 10여 만 명이 만주 무순(無順)의 동쪽 사르흐 전투에서 누르하치의 후금 군사에게 대패하였다. 이때 조선의 도원수(都元帥)강홍립(姜弘立)은 조선의 원군 1만 3천여 명을 거느리고 누르하치에게 항복하였다. 사르흐 전투는 한족(漢族)의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던 전쟁이었다. 이후 후금의 오랑캐 사신이 압록강에 와서 “이미 양국이 서로 강화(講和)해 놓고 어찌하여 명나라를 도왔는가.”라며 조선을 힐난하자, 북병사이수일이 “명나라는 곧 부모의 나라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구원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다고 문책하는가. 그리고 또 양국이 진정 화해하였다면 너희도 곧장 요새에서 군사를 철수시켰어야 하는데, 그러한 호의가 지금까지 있었던가.” 하고 따지니, 오랑캐 사신이 감히 다시 비난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1619년(광해군 11) 북병사의 임기가 만료되어 마땅히 체직되어야 했지만, 적당한 후임자를 구하지 못하여 교체되지 못하였다. 그 사이에 둘째아들이 죽는 등 연달아 슬픈 일이 있었으나,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였다.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북병사이수일은 기치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당상(堂上)에 앉아서 장사(將士)를 집합시키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 북병사에 새로 임명된 이괄(李适)이 함경도로 출발하기 직전에 반정에 참가하도록 권유를 받고 반정에 가담한 것을 보면, 북병사이수일은 인조반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宣傳官)이 말을 타고 급히 달려서 경성(鏡城)의 북병영(北兵營)에 이르렀는데, 그를 통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복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였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갑옷을 벗고 조정의 명령을 받들었다. 최일선에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던 북병사이수일은 비상시에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직후 이수일은 북병사에서 중앙으로 소환되어, 한직인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중추부 지사로서 이수일은 의정부 회의에도 참석하고,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經筵)에도 참석하였다. 이때 인조가 이수일에게 북방의 대책을 묻자 이수일이 대답하기를, “북방에는 지금 군사들이 쇠약하고 백성들이 흩어지고 없습니다. 오로지 고을[邑]에는 훌륭한 수령을 가려서 임명하고 진(鎭)에는 훌륭한 장수를 골라서 임명해야만, 선후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인조가 훌륭한 대책이라고 칭찬하였다. 1624년(인조 2)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이괄이 평안도 군사를 거느리고 <이괄의 난>을 일으키자, 인조가 함경도 군사를 이끌었던 이수일을 4도(道)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여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을 도와 이괄의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하고,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부원수이수일이 관군을 거느리고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물리치며 서울을 수복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21일),(『인조실록』 2년 2월 21일) 선봉장 정충신(鄭忠臣)·남이흥(南以興)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갈마재의 왼쪽에 진을 치고 부원수이수일은 군사를 이끌고 갈마재의 오른쪽에 진을 치면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이괄의 반란군을 좌우에서 협공하여 반란군의 중견(中堅)을 꺾었다. 이로 말미암아 반란군의 형세가 크게 꺾이면서 반란군은 패주를 하다 경안(慶安)에 이르렀고, 이때 이괄은 그 부하의 손에 살해되었다. 도원수장만은 반란군의 뒤를 추격하고, 부원수이수일은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승리를 보고하였다. 인조는 승리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부원수이수일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시켰다. 이어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이수일은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훈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인조실록』 2년 3월 8일) 그런데 도원수장만과 부원수이수일의 사이가 나빴던 관계로 싸움에서도 서로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공신을 책봉할 때도 장만이 이수일의 공적을 깎는 바람에 이수일은 2등으로 책훈되었다고 한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면서 인조가 강화도에 피난을 갔는데, 이수일이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왕을 호위하였다. 1628년(인조 6) 형조 판서(判書)가 되었다가,(『인조실록』 6년 1월 17일) 이후 남한산성수어사(南漢山城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인조실록』 10년 3월 24일),(『인조실록』 10년 4월 15일) 1632년(인조 10) 5월 27일 노병으로 서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9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수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생김새가 괴걸하고 준수하며, 성품이 침착하고 조용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호방하여, 글공부를 멀리 하고 활 쏘고 말 타기를 좋아하였다.

안으로 인후(仁厚)한 내공을 쌓아서 밖으로 화순(和順)한 성품이 드러났다. 이수일은 난리를 만났을 때에 더욱 의기를 분발하였고, 적과 싸울 때에는 행동거지가 더욱 안정되었다. 평상시 병졸들 중에서 계급이 제일 낮은 사람과도 함께 어울리며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희귀한 물건들도 나누어 썼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들이 싸움에서 남보다 먼저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싸울 때에는 먼저 척후병을 보내어 적의 동정을 헤아리고 공격할 기회를 노렸으며, 먼저 참모들과 작전 계획을 세운 뒤에 군사 행동으로 옮겼다. 이수일은 수십 번, 수백 번의 전투를 치렀으나, 싸움에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던 것은 이렇게 군사를 통솔했기 때문이다. 동부(銅符 : 청동으로 만든 무장의 신표)를 차고 도절(桃節 : 복숭아나무로 만든 무장의 지휘봉)을 잡은 것이 40년이 넘었으나, 스스로 검약하고 절조를 지키면서 청빈과 각고(刻苦)의 생활을 줄곧 하였기 때문에 당시 의정부의 대신들이나 비변사(備邊司)의 무장들도 이수일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또 집안에서는 9살 연하의 아내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함께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고, 형제들에게 우애를 돈독하게 베풀었다. 종족이나 친구들 가운데 가난해서 불을 지펴 밥을 짓지 못하는 사람이나, 자녀를 장가보내고 출가시키지 못하는 사람이나, 또는 죽어서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이수일 부부의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수일의 3형제 가운데 맏형 이유일(李惟一)과 중간형 이극일(李克一)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 조카 이익(李瀷) 등을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돌보고 잘 키워서 모두 독립시켰다. 세상이 어지럽고 풍속이 혼탁하자, 평상시에 스스로 사대부로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재물을 탐내고 세속에 물들어 이름을 더럽히고 몸을 망치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수일 부부는 홀로 더러운 세속에 발을 들어놓지 않으려고 옷을 걷고 멀리 피하며 발을 높은 곳에 디뎠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수일을 ‘무인(武人) 중에 완인(完人 : 완전한 인격자)’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이완은 효종(孝宗) 때 ‘북벌(北伐)의 명장(名將)’이 되었다.

병마사와 지방의 수령관을 지낼 때 이수일은 겸손하고 공경한 태도로써 자신의 고귀한 지위를 잊고 성의를 다하여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이 한미한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수일을 따랐다. 일찍이 자기의 위엄을 세우려고 이래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 않았고, 또 자기의 현명함을 드러내려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병사나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속이지 못하였고, 무슨 일이든지 잘 성취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리하여 경상도 진주·성주·통영과 경기도의 수원과 함경도의 경성(鏡城) 등지에서 백성들이 그를 위한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그는 일찍이 화려한 꾸밈이나 교만하고 인색함을 마음속에 품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색 또한 겉으로 한 번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이수일이야말로 ‘인과 지를 함께 갖춘 명장’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무이다.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북촌(北村) 금생리(金生里) 석교(石橋)에 있는데, 이경여(李敬輿)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 죽은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 전주 이씨는 정종(定宗)의 현손인 장원감(長原監) 이귀년(李貴年)의 딸인데,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이정(李淀)은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지냈고, 차남 이용(李溶)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3남 이완은 무과에 급제하여 우의정과 판서를 지냈다. 장녀는 군수(郡守)최위(崔褘)에게, 차녀는 군수한필후(韓必厚)에게, 3녀는 좌랑에 추증된 채계주(蔡繼周)에게, 4녀는 사헌부 대사헌이시해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서자 이재(李滓)는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고, 서출 장녀는 봉사(奉事)이형(李泂)에게, 서출 차녀는 사과(司果)조문발(趙門發)에게, 서출 3녀는 부사(府使)장훈(張曛)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부인 전주 이씨는 아름다운 부덕을 가지고 있었다. 자랄 때 계모가 그녀를 몹시 미워하였으나,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효도를 다하였다. 형제 중에 혼자 된 사람이 있으면 남녀를 막론하고 집으로 불러다가 의식을 함께 하였다. 성품이 근면하고 검소하여, 고운 옷을 입지 않고 몸단장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길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위와 신분이 높아져도 근본을 잊지 않고 늙어서도 손에 베틀의 북을 놓지 않았다. 제수(祭需)와 좨주(祭酒)를 종들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정성껏 마련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었다. 3남 4녀의 자식들을 사랑으로 기르고 하인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규문(閨門) 안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넘쳤다. 부인 전주 이씨는 남편 이수일보다 16년을 더 살면서 7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1647년(인조 25) 봄 대단치 않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85세였다. 그해 4월 풍수의 말에 따라 임시로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가 1649년(효종 즉위년) 남편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백강집(白江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백헌집(白軒集)』
  •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계곡집(谿谷集)』
  • 『기언(記言)』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춘당집(同春堂集)』
  • 『대산집(大山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속잡록(續雜錄)』
  • 『고대일록(孤臺日錄)』
  • 『후광세첩(厚光世牒)』
  • 『월사집(月沙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약천집(藥泉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오리집(梧里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