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항(李性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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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3년(선조 36)∼1660년(현종 1) = 58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장령(掌令)·사간원 사간(司諫)이다. 자(字)는 성구(聖久)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충청도 당진(唐津) 출신으로서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이광후(李光後)이고, 어머니 연성김씨(蓮城金氏)는 김취경(金就鏡)의 딸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의 8대손이고, 병조 판서황정욱(黃廷彧)의 손서(孫壻)이다. 우계(牛溪)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동춘당(同春堂)송준길(宋浚吉)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인조 때 예조 좌랑·병조 좌랑을 거쳐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나갔다. 인조 말년에 김자점(金自點)이 정권을 잡고, <강빈(姜嬪) 옥사>를 일으켰을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어린 세 아들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영의정김자점(金自點)의 미움을 받아 쫓겨났다. 효종 때 사헌부 장령(掌令)으로서, 붕당(朋黨)의 폐해를 논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연풍 현감(延豊縣監)으로 좌천되었는데, 서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추천으로 사간원 헌납(獻納)·사간(司諫) 등을 두루 거쳐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되었다. 현종 때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로 일어난 예송(禮訟)논쟁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 후 정평부사(定平府使)를 거쳐 선천부사(宣川府使)가 되었으나, 정평부사로 재임하였을 때 죄인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에 고양(高陽)의 여사(旅舍)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전옥서(典獄署) 봉사(奉事)로 재임하였는데, 맹인 죄수를 도망치게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그해 10월에 사헌부에서 “맹인 김응정(金應鼎)을 전옥서에 잡아 가둔 후에, 옥관(獄官)이 제멋대로 끌어내 도망치게 해서 놓쳤다가 잡았으니, 봉사(奉事)이성항(李性恒)을 체포하여 정죄(定罪)하소서.”하고 아뢰자,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년 10월 13일] 즉 이성항은 맹인 죄수를 동정하여 석방시켰다가, 자신이 장일백(杖一百)에 도삼년(徒三年)으로 정배되고 고신(告身)을 추탈 당하였다.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사마방목』]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음서(蔭敍)로 1637년(인조 15) 평택 현감(平澤縣監)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5년 12월 25일] 1639년(인조 17)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7세였다.[『문과방목』]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643년(인조 21) 6월에 병조 좌랑(兵曹左郞)이 되었는데, 그해 10월에 고향인 충청도 당진(唐津)으로 내려가 어머니의 병환을 구완하였다.

1644년(인조 22) 2월,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해 4월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충청도 홍산 현감(鴻山縣監)으로 나갔으나,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으므로 충청도 당진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의 상기(喪期)를 끝마치고, 1646년(인조 24) 11월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647년(인조 25) 1월, 지평이성항이 “근래에 사치가 날로 심하여 천한 하인들까지도 모두 비단옷을 입고 다닙니다. 일전에 금리(禁吏)가 두 사람을 잡아 왔는데, 한 사람은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었고 또 한 사람은 중국산 명주옷을 입었습니다. 신이 즉시 그 옷을 벗겨서 불태우고 그 사람들을 벌주게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제 3왕자)의 집에서 그날 법을 집행한 금리(禁吏) 두 사람을 잡아다가, 강제로 조례(皂隷: 종)의 복색을 입힌 뒤 패(牌)를 채워 길거리에서 조리돌리게 했다고 합니다. 존귀한 집안에서 멋대로 국금(國禁)을 범하도록 내버려 둔 법부(法府)의 관원들을 파직하소서.” 하고 아뢰니 사헌부의 관원들이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이때 인조가 사헌부의 관원들을 체직시켰는데,(『인조실록』 25년 1월 7일) 이성항은 사안이 비록 왕자와 공주의 집안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조금도 너그럽게 봐주지 않고 국법(國法)을 엄하게 지켰다.[비문]

그 당시에 영의정김자점(金自點)이 숙원(淑媛) 조씨(趙氏)와 손을 잡고, <강빈(姜嬪) 옥사>를 일으켜 강빈(姜嬪: 소현세자 빈)을 죽이고, 그의 어린 세 아들까지 연좌(連坐)시켜 제주도로 유배하였는데, 사헌부 지평이성항은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제주도에 유배된 세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만 살아남고 나머지 두 아들은 죽고 말았다. 김자점 일당은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강빈(姜嬪)과 그녀를 감싸는 사람들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사헌부 지평이성항이 소신을 지키며 협력하려고 하지 않자, 그를 온갖 방법으로 공갈하고 협박하였다. 이성항의 처지를 위태롭게 여긴 동료들이 그에게 충고하였으나, 그는 “화(禍)와 복(福)은 하늘에 달려 있다. 나는 다만 지켜야 할 소신만을 지킬 따름이다.”라고 태연하게 말하였다.[비문]

지평이성항이 휴가를 청하여 충청도 당진(唐津)으로 가서 아버지의 병환을 구완하였을 때, 마침 큰 산불이 일어나 산등성이와 농토를 불태웠다. 이때 그는 인조에게 “최근 수년 동안 전하(殿下)께서 많은 결점과 잘못을 초래하였으므로, 하늘이 노하여 이처럼 전례가 없는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지난 번 <강빈(姜嬪) 옥사>의 허실(虛實)을 신은 감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산등성이를 불태우는 화염(火焰)이 몹시 거세어서 옥석(玉石)이 모두 함께 불에 타버렸으니, 족히 화기(和氣)를 손상하고 재앙을 초래할 만한 일입니다.” 라고 임금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조는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비문] 이후 이성항은 조정으로 돌아와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兩司)의 관직을 두로 역임하였으나, 마침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충청도 당진의 선영(先塋)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비문]

효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에서 효종에게 조정의 분열을 가져오는 붕당(朋黨)의 폐단을 막을 방도를 건의하였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였다. 이때 사헌부 장령이성항은 사헌부 지평(持平)이수함(李守諴)이 주장하는 논리를 밝히는 한편, 사간원 정언(正言)이상진(李尙眞)의 논리에 모순이 있다고 논박하였다. 이때 이성항이 ‘당론을 타파할 수 없다.’고 한 발언이 효종의 노여움을 사면서 결국 연풍 현감(延豊縣監)으로 좌천되었다. 비록 승정원(承政院)과 대신(大臣)들이 쟁집(爭執)하였으나, 효종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하였다. 이때 낙정(樂靜)조석윤(趙錫胤)은 장령이성항이 사헌부를 떠나는 것을 아쉽게 여기며, “그대가 말한 바가 모두 옳으니 후세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비문] 1650년(효종 1) 6월 충청도 연풍 현감(延豊縣監)으로 나갔는데, 백성들을 사랑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효종실록』 1년 6월 24일) 그러나 백성들이 염초(焰硝)굽는 일을 기피하자, 이성항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탄핵하였으므로, 충청도 면천군(沔川郡)으로 유배되었다.[비문]

그 뒤에 가뭄으로 인하여 사면을 받은 후, 다시 서용(敍用)되어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고,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 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는데,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여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비문]1657년(효종 8) 7월에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었는데,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할 때, 세자(世子: 현종)에게 환관(宦官)을 절대로 친압(親狎)하지 말라고 진계(進戒)하였다. 1658년(효종 9)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때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평안도 지방을 염찰하고 돌아와 효종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비문] 1659년(효종 10) 비변사(備邊司) 낭청(郎廳)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함경도 정평 부사(定平府使)가 되었다. 정평 부사이성항은 선정을 베풀었으나, 정평의 사형수(死刑囚)가 친척을 꼬여서 자기 대신에 형벌을 받게 하려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평 부사이성항이 이 사실을 함경도 감사에게 보고하자, 함경도 감사는 그 사형수를 함흥의 감영(監營)으로 압송하도록 한 후에 처형하였다.[비문]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효종의 국상(國喪)때, 정평 부사이성항은 궁궐로 달려가 곡읍(哭泣)하지는 못하였으나, “천년 이후에나 이와 같은 훌륭한 성군(聖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며, 지방 관아(官衙)에서 행하는 예제(禮制)보다 더 슬프게 통곡하였다. 그 뒤에도 남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효종에 관한 말이 나오면, 반드시 오열(嗚咽)하였으므로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비문] 그해 7월에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는데, 현종에게 임금이 경계해야 할 점을 진달(進達)하자, 현종이 가납(嘉納)하였다.[비문] 이때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과 남인의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가 주장하는 삼년설(三年說)이 대립하면서, <기해(己亥)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사간이성항은 기년설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해 9월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에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9월 10일) 얼마 후, 사헌부에서 “이성항이 전일에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있을 때, 사형수(死刑囚)를 함흥의 감영(監營)으로 보내서, 함경도 감사가 임의로 죄수를 처형하는 일이 있었는데, 정평부사이성항과 함경도 감사를 처벌하소서.” 하였으므로, 현종이 정평부사이성항과 함경도 감사를 아울러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해 12월, 이성항이 체포되어 선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중도(中道)에 눈보라를 맞으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다가 병에 걸려서, 1660년(현종 1) 1월 5일 고양(高陽)의 여사(旅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8세였다.

목민관 이성항의 애민 정치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애민(愛民)편에서 이성항이 충청도 연풍 현감(延豊縣監)으로 있을 때,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핀 사실을 소개하였고, 해관(解官)편에서는 수령이 자기 잘못을 스스로 탄핵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사실을 소개하였으며, 형전(刑典)편에서는 그가 함경도 정평 부사(定平府使)로 재임하였을 때, 정평의 사형수(死刑囚)를 함경도 감사에게 보내어 함흥의 감영(監營)에서 사형수를 처형한 사실을 소개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1818년(순조 18)에 목민관(牧民官: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기록한 책인데, 부임(赴任)·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의 12편으로 나누고, 각 편을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찬하였다. 효종 때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이성항이 행한 업적을 다산정약용이 『목민심서』의 72조 가운데 3조나 기록한 것을 보면, 그가 이성항의 목민관으로서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성항의 업적은 조선 후기 목민관의 귀감(龜鑑)이 되었던 것이다.

1650년(효종 1) 6월 이성항은 충청도 연풍 현감(延豊縣監)으로 부임한 후, 성심을 다해서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는 한편, 고을의 사람들을 보듬어 교화(敎化) 정치를 폈다. 우선 고을에서 일찍이 충절(忠節)과 효자(孝子)로 이름이나 정문(旌門)이 세워진 집을 방문하여 손수 글을 지어 그 묘소에 술잔을 올렸으며, 고을에 충절과 효행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조정에 보고하여 정문(旌門) 복호(復戶)하는 예전(禮典)을 거행하였다. 또 명절(名節) 때마다 관가의 뒤뜰에 음식을 마련해 놓고 70세 이상의 노인(老人)들을 초청하여, 현감이성항이 빈주(賓主)의 예를 갖추어 노인들을 대접하였다. 또한 혼기(婚期)가 지났는데도 시집을 가지 못한 여자들에게 관가에서 그 혼수 비용을 마련해 주어 시집을 보냈으며, 자제(子弟)들 가운데 재능이 있는 자들에게는 식량을 지급하여 그들의 학업을 권장하였다. 연풍 현감이성항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애민 정치에 고무(鼓舞)되었다.[비문]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하는 것)편에서 소개하기를, “이성항이 연풍 현감(延豐縣監)으로 있을 때, 노인들을 뜰로 맞아들여, 빈주(賓主)의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시집가지 못한 과년한 처녀는 혼수를 장만해 주었으며, 고을의 자제들 중에 재능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양식을 주고 학업을 권장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경내가 모두 고무(鼓舞)되었다.”고 하였다. [『목민심서』 애민(愛民) 6조]

이성항이 연풍 현감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는 <북벌(北伐) 계획>을 세우고 화약의 원료가 되는 염초(焰硝)를 굽는 정령을 시행하였다. 현감이성항도 고을 사람들에게 염초를 구워 바치도록 하였으나, 그 방법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할당량의 염초를 채울 수가 없었다. 그 부근 고을의 수령관들은 구차스럽게 죄를 면하기 위하여, 편문(便文: 자기에게 유리하게 쓰는 글)으로 보고하였으나, 현감이성항은 “그렇게 하면, 성현(聖賢)께서 ‘임금을 속이지 말라’고 가르친 뜻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하고,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결국 그는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여, 기어코 파직당하면서 현풍 고을을 떠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현풍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이 서울로 올라와 대궐로 가서 울면서 이성항을 현풍 고을에 유임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군수물자인 염초를 구워 바쳐야하는 중대한 업무를 폐각(廢閣: 업무를 폐지함)시킨 죄를 지고 충청도 면천군(沔川郡)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가뭄으로 인하여 사면을 받고, 다시 관직에 서용되었다.[비문]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 해관(解官: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편에서 “이성항이 연풍 현감(延豐縣監)으로 있을 때, 마침 조정에서 염초(焰硝)를 구워서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 후,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조사하는 와중에 이웃 고을에서는 문서를 거짓으로 꾸며서 구차하게 그 죄를 모면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성항은 ‘이렇게 하면, 「임금을 속이지 않는다」는 의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조정에 사실대로 밝힌 후, 스스로를 탄핵하였으므로, 파면되어 고을을 떠났다.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이 이를 듣고, 다투어 서울의 대궐로 달려가서 울부짖으며 수령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고 소개하였다.[『목민심서』 해관(解官) 6조]

1659년(효종 10) 이성항이 함경도 정평 부사(定平府使)가 되었는데, 함경도 백성 가운데에는 토착 여진족(女眞族)이 많아 사납게 날뛰었다. 정평 부사이성항은 금령을 내려 이들을 억압하였으나, 금령을 범하고 죄를 짓는 자가 많았다. 정평의 사형수(死刑囚)한 사람이 사촌 동생에게 많은 재물을 주며 “네가 만약 내 대신 죄를 받는다면, 도형(徒刑)으로 유배되는 정도의 형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꼬드겼으므로, 그 사촌 동생이 그의 말대로 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정평 부사이성항이 그 사형수를 잡아 가두고 함경도 감사에게 보고하자, 함경도 감사는 그 사형수를 함흥의 감영(監營)으로 압송하여 처형시켜버렸다.[비문] 원래 법규에 의하면, 사형수는 <삼복(三覆) 제도>에 의하여, 지방에서 첫 번째 심문하고, 감영(監營)에서 두 번째 심문하고, 마지막으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세 번째 심문을 한 후, 임금의 재가(裁可)를 받아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이성항은 처음에 감영에서 사형수를 처형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서 곧장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였는데, 이성항과 함경도 감사가 모두 연좌되어 죄를 받게 되었다.[비문]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 형전(刑典)에서 “이성항이 정평 부사(定平府使)가 되었을 때, 사형수(死刑囚) 한 사람이 많은 재물을 미끼로 그 사촌 동생에게 ‘네가 만약 나를 대신하면, 도형(徒刑)의 유배에 그치고 말 것이다.’라며 꾀었는데, 사촌 동생이 그 말대로 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성항이 그 사형수를 체포하여 감사에게 보내자 감사가 사형수를 처형하였다. 얼마 후, 수소문 끝에 그 정상을 알아낸 이성항이 곧 자신을 탄핵하니, 이성항과 감사가 모두 죄를 받고 파직되었다.”라고 기술하였다. [『목민심서』 형전(刑典) 6조]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고 지조가 굳었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이성항(李性恒)은 훼예(毁譽)나 영락(榮落) 때문에 우의(友誼)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그는 마음이 쇳덩이같이 단단한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이성항은 고금(古今)의 역사적 사실과 인물의 장단점에 대하여 두루 정통하였는데, 항상 중국 송(宋)나라의 명신(名臣)인 장영(張詠)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스스로 그와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에 아침저녁으로 장영의 글을 읽고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을 주고받았는데, 논자(論者)들은 그의 행동이 송나라 장영의 행적과 가깝다고 논평하였다.[비문]

이성항의 아버지 이광후(李光後)는 부인을 여의고 홀아비로 살았는데, 행실이 독실하였던 아들 이성항이 홀로 사는 아버지 곁에서 시봉(侍奉)하면서 극진하게 효도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을 간호를 할 때에는 심지어 아버지의 대변(大便)의 맛을 보아 병의 상태를 살피고 약을 짓기까지 하였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 이광후는 끝까지 시첩(侍妾)을 들이지 않고 홀아비로 살다가 돌아갔다. 이성항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논어(論語)』에서 효자 고어(皐魚)가 말했던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받들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외우면서 언제나 혼자 슬퍼하였다.

그는 조정에 벼슬한 30년 동안에 청렴한 절조(節操)가 변하지 않았으나, 만년(晩年)에 이르러 신진(新進) 사류(士類)들과 함께 관직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생각하였다. 항상 인륜(人倫)을 애호하여, 효성이 있거나 의리가 있는 사람을 보면, 지성으로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시사(時事)를 이야기할 때에는 손뼉을 치며 감탄하고 격앙하기도 했으며, 친족들을 보살피고 구휼할 때에는 곡진하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이성항의 장례(葬禮) 때, 그의 영전(靈前)에 엎드려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길게 곡(哭)하고 슬퍼하는 조문객(弔問客)이 많았다.[비문]

1659년(현종 즉위년) 9월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에 임명되었을 때, 아들 이견(李堅)과 서자 이재중(李在重)을 데리고 갔는데, 부인 황씨는 병으로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전에 그가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재임할 때에 처리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였다 결국 그해 12월에 체포되어 선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중도(中道)에 눈보라를 맞으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게 되면서, 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때 아들 이견(李堅)은 손수 아버지 이성항의 말고삐를 잡고 울면서 천천히 가자고 청하였으나, 이성항은 “군부(君父)의 명령을 받고 어찌 감히 지체하여 갈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길을 재촉하였다. 서울 근교의 고양(高陽)에 이르러, 이성항의 병이 위독해졌는데, 고양군수(高陽郡守)가 그 소식을 조정에 알리자, 현종이 우선 그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병중에 있던 이성항은 “성은(聖恩)이 망극하다.”고 울먹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正裝)을 하고, 대궐을 향하여 세 번 절을 하고 사은(謝恩)하였다. [비문]

결국 이성항은 1660년(현종 1) 1월 5일, 고양(高陽)의 여사(旅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을 때, 아들 이견(李堅)과 서자 이재중(李在重)에게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바꾸어 깔게 한 후, 정장(正裝)을 반듯하게 하고, 점잖은 유자(儒者)의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는데, 비록 평소에 예법을 깍듯하게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객사(客死)하면서 유자(儒者)의 체모를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성항의 부인 황씨는 집에서 남편이 객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고 15일 동안 슬퍼하다가 끝내 돌아갔다. 이성항 부부의 빈소가 차려지자, 우의정정유성(鄭維城)과 판서홍명하(洪命夏)가 현종에게 “이성항은 임금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기뻐하다가 죽었으니, 마땅히 추증(追贈)하는 은전(恩典)을 내려줘야 합니다.” 하고 아뢰니, 현종이 관례에 따라 부조(賻助)하도록 명하였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당진현(唐津縣) 고산봉(高山峰) 뒤쪽에 있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는 성균관 학유(學諭)황석(黃奭)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아들 이견(李堅)은 장릉 참봉(章陵參奉)을 지냈고, 손자는 이양석(李讓錫)·이영석(李寧錫)·이대석(李大錫)이다. 측실(側室)에서 1남을 낳았는데, 서출 아들은 이재중(李在重)이다.

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는 선조 때 병조 판서를 지낸 황정욱(黃廷彧)의 손녀이며, 성균관 학유(學諭)황석(黃奭)의 딸이다. 부인 황씨는 부귀(富貴)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화려하게 사치하는 버릇이 전혀 없었고, 첩어(妾御: 첩과 시종)를 대할 때에도 기피하거나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남편 이성항이 고양(高陽)의 여사(旅舍)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황씨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음식을 먹지 않고 슬퍼하다가, 1660년(현종 1) 1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0세였다. 아들 이견(李堅)이 서출 동생 이재중(李在重)과 함께 고양의 여사(旅舍)에서 아버지의 관(棺)을 받들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서는 며느리 윤씨(尹氏)가 친척들과 함께 시어머니 황씨를 염습(殮襲)하고 있었다. 아들 이견과 며느리 윤씨는 부모의 장례를 치른 후, 그해 3월에 충청도 당진현(唐津縣) 고산봉(高山峰) 뒤쪽에 합장(合葬)하였다. 그런데 아들 이견의 아내 윤씨(尹氏)도 이때 지나치게 놀라고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는데, 이성항의 집안이 줄초상을 겪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비문]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명집(東溟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목민심서(牧民心書)』
  • 『문곡집(文谷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학곡집(鶴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