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중(李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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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9년(중종 34)∼1593년(선조 26) = 55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호조 판서(戶曹判書)·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이고, 봉작(封爵)은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자(字)는 공저(公著)이고, 호(號)는 파곡(坡谷)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금천군(錦川君)이감(李瑊)이고, 어머니 서흥김씨(瑞興金氏)는 사헌부 감찰(監察)김윤장(金允章)의 딸이다. 처음에 이소재(履素齎)이중호(李仲虎: 양녕대군 현손)와 척암(惕菴)김근공(金謹恭: 김효원의 스승)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나중에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이 되어,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과 학봉(鶴峰)김성일(金誠一)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 세종의 서출 제2왕자)의 현손이고, 순천군(順川君)이관(李琯)의 조카이며, 사헌부 집의(執義)이경중(李敬中)과 좌부승지(左副承知)이양중(李養中)의 형이다.

1570년(선조3)의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5년(선조 8) 동서분당이 되자, 동인으로 지목되어 한산 군수로 좌천되었다. 1591년(선조 14) 세자를 세우도록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충청도 감사로 좌천되었고, 그해 8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 1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어사(守禦使)에 임명되어 선조를 호종하였다. 평양에 이르러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의주에서 유성룡과 함께 선조의 요동(遼東) 피난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는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관량사(管糧使)를 자청하여 일을 하다가 과로로 1593년 7월 경상도 함창에서 돌아갔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559년(명종 14) 아버지 금천군(錦川君)이감(李瑊이 돌아가자, 3년 동안 동생 이경중(李敬中)·이양중(李養中)과 함께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그 후,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사마시에 합격한 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유생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깊이 사귀었다. 1570년(선조 3)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국조방목』] 그해 7월,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어,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비문]

1571년(선조 4)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승정원 주서(注書)로 옮겼다. 1573년(선조 6) 봄에 사복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 후, 호조·예조·병조의 좌랑(佐郞), 사간원 정언(正言)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서, 이조 좌랑(吏曹左郞)이 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홍문관에 있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비문] 1575년(선조 8) 가을 조정에서 동서(東西) 분당(分黨)이 일어나자, 이성중은 서인에게 동인(東人)으로 지목되어 이조 좌랑에서 파직되었다. 그 후, 성균관 직강(直講), 병조 정랑(兵曹正郞), 홍문관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사간원에서 “이성중이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 인사 행정을 제멋대로 하였습니다.”라고 탄핵하면서, 마침내 충청도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좌천되었다.[비문]

1581년(선조 14) 조정으로 들어와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8월, 어머니 상을 당하여 동생 이경중(李敬中)·이양중(李養中)과 함께 선영(先塋)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3세였다. 상례(喪禮)를 치르는 3년 동안 초막(草幕)에서 미음만 마시고 새우잠을 자는 등 힘든 여묘살이를 한 결과 몸이 허약한 중간동생 이경중(李敬中: 1542~1584)은 점차 몸이 수척해지면서 큰 병에 걸려, 탈상한 직후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43세의 나이로 죽었다. 1583년(선조 16) 상례(喪禮)가 끝나자,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고,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 응교(應敎)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비문] 1584년(선조 17)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고, 그해 겨울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知)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1586년(선조 19) 5월,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1587년(선조 20)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1588년(선조 21) 7월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1589년(선조 22) 다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을 때에는 인사 행정을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유성룡과 함께 동인의 온건파였던 이성중은 과격파 이발(李潑)·정여립(鄭汝立) 등을 억제하고 서인과 타협하려고 하였다. 그해 가을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서인의 중진인 좌의정정철(鄭澈)은 그 위관(委官: 재판장)이 되어, <정여립 옥사>를 다스리면서 <기축옥사(己丑獄死)>로 확대하여 동인의 과격파를 비롯한 1천여 명을 숙청하였으나, 동인의 온건파인 유성룡·이성중 등은 해를 입지 않았다. 1590년(선조 23)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가, 예문관 대제학으로 전임되면서, 마침내 문형(文衡)이 되었는데, 이성중은 일찍이 문형의 후보자로 권점(圈點)을 받았으며, 문형의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서인의 횡포를 막으려고 하다가, 서인에 의하여 한직인 돈녕부 동지사(同知事)로 좌천되었다.

1591년(선조 24) 나이 53세 때 다시 홍문관 대제학이 되면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시폐(時弊) 12조를 올렸다. 그는 당시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되어 동인과 서인이 서로 싸우는 조정의 폐단을 극력 논하면서, 세자(世子)를 빨리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성중은 서출 제2왕자인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세우는 것을 싫어하였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그날 밤에 임금의 특명으로 충청도 관찰사(觀察使)로 좌천되었다. 그해 8월,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서인 출신 대간(臺諫)들이 이성중을 탄핵하여 충청도 감사에서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수어사(守禦使)에 임명되었는데 여러 도(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수도 서울을 방어하였다. 그해 5월, 서울 도성이 함락되자, 필마(匹馬)로 어가(御駕)를 뒤쫓아 평양의 행재소(行在所)로 갔는데,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전임되었다. 그해 6월, 어가를 호종하여 의주에 도착한 후,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임명되었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5만여 명의 명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을 수복할 때, 조정에서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명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일이었다. 이때 관량사(管糧使)를 자청한 호조 판서이성중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는데, 군량미가 한 번도 부족하거나 바닥난 적이 없었다. 평양을 수복한 뒤,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기 위하여 명나라 군사가 남하하자, 관량사이성중도 군사를 따라 마침내 경상도에 이르렀다. 그는 3남 지방의 쌀을 끌어다가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는 일을 하다가 너무 과로한 나머지 그해 7월 7일, 경상도 함창현(咸昌縣)에서 갑자기 돌아갔는데, 향년 55세였다. 그해 10월, 경기 파주의 파평산(坡平山)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비문]

문집으로 『파곡유고(坡谷遺稿)』 1책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덕성(德性)이 온화하고 후덕하였으며, 말과 행동에 화기(和氣)가 넘쳤다. 가정에서 예법을 지켜 집안이 매우 질서가 있었다.[비문]

이성중은 3형제 중의 맏아들로 1539년(중종 34) 윤7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장난을 치며 놀 때에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는데, 어려서부터 동생 이경중(李敬中)·이양중(李養中)과 함께 삼촌 순천군(順川君)이관(李琯)에게 예법(禮法)을 배워 제기(祭器)를 갖추고 제사 지내는 놀이를 곧잘 하였다. 일찍이 아버지 금천군(錦川君)이감(李瑊)과 삼촌 순천군이관은 중종과 인종의 국휼(國恤)을 당하였을 때, 고례(古禮)에 따라 부모의 상과 똑같이 방상(方喪: 참최복) 삼년(三年)의 복을 입어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하였고, 이를 몸소 실행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14권] 이성중은 어려서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와 삼촌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3형제가 모두 가학(家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수재(秀才)로 소문이 났다. 성장한 후에도 동생들과 함께 배움에 힘썼는데 훌륭한 재주가 눈에 띄게 돋보였다.[비문]

이후 아버지 이감과 삼촌 이관은 이성중·이경중·이양중 3형제를 이소재(履素齎)이중호(李仲虎: 양녕대군 현손)와 척암(惕菴)김근공(金謹恭)의 문하(門下)에 보내 학문을 수련하게 하였다. 아버지 이감과 삼촌 이관은 일찍이 이소재(履素齎)이중호와 친구로 가깝게 교유하였는데, 이감이 이중호의 학문이 고매하다고 하여,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 아버지 이감은 이중호보다 3세 아래였고, 삼촌 이관은 이중호보다 6세 아래였다. 또한 척암(惕菴)김근공(金謹恭)은 동인 김효원(金孝元)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학문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났었다. 이성중 3형제는 이소재이중호과 척암김근공의 문하(門下)에서 의리(義理)를 중시하는 학문을 배우면서, 본심(本心)을 보존하려고 힘썼으며, 세상에 처신할 때에는 한결같이 명예를 지키고 예법에 따라서 행동하며 자신을 단속하는데 힘썼다. 이성중은 나이 20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는데, 그 곳에서 유생 유성룡(柳成龍)과 김성일(金誠一)을 만나 깊이 사귀었다. 나이 21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동생들과 여묘살이를 하였다. 나이 32세 때 정시(庭試) 문과에서 초시(初試)에 장원하여 회시(會試)를 거치지 않고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여, 마침내 대과에 급제하였다.[비문]

이성중이 가깝게 교유한 인물은 모두 서애(西涯)유성룡과 학봉(鶴峰)김성일과 같은 한 시대의 명현(名賢)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동인(東人)으로서 지향(志向)하는 바가 같았으므로, 서로 우의가 매우 깊었다. 당시 퇴계(退溪)이황(李滉)은 안동(安東)의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있으면서 조정의 벼슬을 받고 서울에 올라왔다가 곧 벼슬을 사임하고 안동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퇴계이황의 제자인 유성룡과 김성일은 이성중 형제에게 퇴계이황을 만나보도록 권유하였는데, 마침내 이들 3형제는 퇴계이황을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그 제자(弟子)가 되었다. 이때 퇴계이황은 이성중 3형제에게 “훌륭한 선비들을 만나보게 되었으니, 이번의 행차가 헛되지는 않았구나.”하고 칭찬하였다. 이후, 막내 동생 이양중은 안동의 도산서원에 유학하여 퇴계이황의 가르침을 받고, 도산서원에서 이름난 제자가 되었다. 이성중·이경중·이양중 3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형 이성중은 호조 판서와 문형(文衡)를 지냈고, 중간동생 이경중은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막내동생 이양중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비록 3형제는 학문이 높았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서, 크게 현달(顯達)하지는 못하였다.[비문]

문집으로 『파곡유고(坡谷遺稿)』 1책이 남아 있다. 이성중은 문장에 뛰어나서 시문(詩文)을 많이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많이 산일(散逸)되었고, 이성중 본인이 당파 싸움을 겪으면서 당세(當世)에 기휘(忌諱)되는 시가 많다고 하여, 만년에 원고 몇 상자를 불태워버렸다. 그는 시문(詩文) 가운데 몇 편만을 골라 『파곡유고(坡谷遺稿)』라는 이름으로 남겨 놓았는데, 후손들이 그의 유고(遺稿)를 집에 갈무리하고 있었다. 이성중의 손자 이명웅(李命雄)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조부 이성중이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있을 때 지은 「한산음(韓山吟)」과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호서음(湖西吟)」을 구하고, 김세렴(金世濂)의 서문(序文)과 이명웅 자신의 발문(跋文)을 붙여서, 1640년(인조 18)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명웅이 간행한 초간본 『파곡유고(坡谷遺稿)』 1책은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유천(柳川)한준겸(韓浚謙)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 그의 사후(死後) 23년이 지난 1615년(광해군 7) 장지(葬地)가 좋지 않다고 하여 파주 파평산(坡平山)의 서쪽 기슭으로 옮겨서 안장(安葬)하였다.[비문]

부인 평양조씨(平壤趙氏)는 의빈부(儀賓府) 경력(經歷)조수(趙琇)의 딸인데, 자녀는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이유징(李幼澄)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고, 차남 이유청(李幼淸)은 의흥 현감(義興縣監)을 지냈으며, 3남 이유심(李幼深)은 양천 현령(陽川縣令)을 지냈고, 4남은 이유침(李幼沈)이다. 장녀는 사인(士人) 박응선(朴應善)에게, 차녀는 생원(生員) 황유첨(黃有詹)에게, 3녀는 현감(縣監)한회일(韓會一: 한준겸의 아들)에게 각각 출가하였다.[비문] 장남 이유징(李幼澄)은 문장과 행실로 세상에 이름났다.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에 가서 의주 목사(牧使) 겸 병마사(兵馬使)에 임명되었으나, 너무 과로한 나머지 1593년(선조 26) 5월 32세의 나이로 의주에서 급사(急死)하였다. 그해 7월, 이성중이 경상도 함안에서 과로로 세상을 떠났는데, 전쟁 중이라서 맏아들 이유징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1604년(선조 37) 이유징은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等)에 책훈되고,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이때 아버지 이성중도 아들의 공으로 <호성공신>의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에 봉해졌고,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되었다. 손자 이명웅(李命雄: 이유징의 둘째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인조 때 대사간(大司諫)·홍문관 부제학·경상도 관찰사(觀察使) 등을 지냈고, 완양군(完陽君)에 봉해졌는데, 조부 이성중의 『파곡유고(坡谷遺稿)』를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파곡유고(坡谷遺稿)』
  • 『유천유고(柳川遺稿)』
  • 『임하필기(林下筆記)』